검찰, 언론 그리고 '홍씨 비밀장부'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경찰의 검찰수사에 새로운 전기?

등록 2005.08.19 09:09수정 2005.08.19 10:41
0
원고료로 응원
이번엔 다이어리다. 거물 브로커 홍모씨의 다이어리에는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은 32명의 이름이 기재돼 있다. 정치인 2명, 전・현직 검사 4명, 경찰관 6명, 방송사 기자 6명 등. 여기에 군인, 세무서와 세관 직원, 구치소 직원까지 망라돼 있다. 안기부 X파일이 ‘특선 세트’라면 홍모씨 다이어리는 ‘종합 세트’다.

사회 곳곳이 모두 썩었다는 식의 얘기는 관두자. 듣기 좋은 꽃 타령도 삼세번이라고 했는데, 들을수록 열 받는 얘기를 중언부언해서 국민 정신건강에 득 될 게 없다.

특화시켜 봐야 할 대목은 두 개다. 먼저 검찰 부분.

안기부 X파일이 공개되자 천주교 인권위원회는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았다는 검사들에 대한 수사를 경찰에 의뢰했다. 검찰이 제 식구를 단죄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고발장을 받아든 경찰은 “원칙대로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수사권 조정 문제로 검찰과 각을 세워왔던 경찰이기에 세간에선 "정말 제대로 수사하는 것 아냐?“라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고발장이 접수된 지 한 달 가까이 흘렀지만 그동안 경찰이 수사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지난 17일 현직 경찰관 4명이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 앞에서 열린 ‘사법제도 개혁을 위한 네티즌연대’ 주최 집회에 나와 떡값 수수 검사에 대한 수사는 경찰이 맡아야 한다고 외쳤다.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경찰이 멈칫댔던 이유는 노회찬 의원이 어제 공개한 떡값 수수 검사들의 면면에서 확인된다. 하나같이 장・차관급에 검사장급들이다. 경찰이 소환조사를 감행하려면 상당한 결단이 필요한 거물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홍씨의 다이어리가 공개됐다. 그리고 그 다이어리에는 전・현직 검사 4명에게 모두 3100만원의 금품과 향응이 제공된 내역이 기재돼 있다. 이름뿐만 아니라 금품과 향응이 제공된 시간과 장소까지 상세히 적혀 있으니 경찰로선 수사를 안 할 수가 없다.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금품과 향응을 받은 전・현직 검사들에 대한 수사는 거물급 전・현직 검사들에 대한 수사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 ‘떡값’과 ‘금품・향응’이란 포장지의 차이는 있지만 알맹이는 같다. 똑같은 불법 수수 행위에 대해 이중 태도를 취할 경우 어떤 화가 미칠지는 경찰도 잘 안다. 경찰로선 배수진을 쳐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다.


물론 검찰이 그런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것 같지는 않다. 홍씨 다이어리에 전・현직 검사들의 이름이 기재된 사실이 확인되자 검찰은 즉각 감찰에 착수했다. 응당 해야 하는 감찰이지만 검사가 경찰의 수사대상이 되는 것을 차단 내지 약화시키는 측면도 없지 않다. 감찰 결과에 따라 검사들에 대한 수사를 검찰이 자진해서 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동일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 검사에 대한 수사만 별도로 떼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건을 통째로 빼오는 것도 어렵다. 이미 경찰이 착수한 수사를 중단시키는 것은 관행상 흔치 않은 일이고, 비난 받을 소지도 크다.

따라서 경찰은 검찰의 감찰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수사의 폭과 속도를 조절하면 된다. 검찰의 감찰이 끝나면 이를 토대로 사법처리 여부에 대한 의견을 달아 검찰에 넘기면 된다. 검찰의 감찰결과가 미진하다면 별도 재조사를 하면 된다. 어떤 경우든 밑질 게 별로 없는, 이른바 ‘꽃놀이패’를 손에 쥔 셈이다.

하지만 떡값 수수 검사에 대한 수사는 다르다. 경찰은 검찰이 부담을 덜어주는 상황을 기대할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검찰로선 떡값 수수 검사에 대한 수사가 몰고 올 여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의 상관’을 수사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만은 아니다. 떡값 수수 검사에 대한 수사는 곧 불법 도청 내용 수사를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떡값 수수 검사를 수사하면서 삼성의 불법정치자금 제공 혐의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홍씨 다이어리에 등장하는 검사에 대해서는 즉각 감찰에 착수하면서도 떡값 수수 검사에 대해서는 감찰을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떡값 수수 검사에 관한 한 경찰은 외통수에 걸려있다. 홀로 총대를 메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어떻게 발걸음을 뗄지가 관심사다. 홍씨 다이어리가 몰고 올 파장을 관전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a <중앙일보>는 19일자에서 브로커 홍씨 장부를 전하면서 초점을 MBC에 맞췄다.

<중앙일보>는 19일자에서 브로커 홍씨 장부를 전하면서 초점을 MBC에 맞췄다. ⓒ 중앙일보 PDF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언론이다.

<중앙일보>는 오늘자 신문에서 홍씨 다이어리를 전하면서 초점을 MBC에 맞췄다. 홍씨로부터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은 방송사 기자는 모두 MBC 기자들이라면서, 홍씨와 MBC 기자들 간의 ‘거래 내역’을 자세히 전하는 기사를 별도 배치하기까지 했다.

다른 신문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중앙일보>의 이런 기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자명하다. 안기부 X파일 내용을 보도함으로써 자사 사주인 홍석현씨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한 MBC에 대한 맞공격의 성격을 띠고 있다.

홍씨 다이어리에 기재된 정치인, 검사, 경찰 등을 뒤로 미룬 채 MBC 기자들을 향해서만 집중포화를 가하는 <중앙일보>의 보도태도가 타당한 것인가 하는 점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지만, 그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게 있다.

<중앙일보>가 홍씨 다이어리를 소재로 안기부 X파일 보도의 주역, MBC에 ‘복수혈전’을 선언함으로써 ‘다이어리’와 ‘X파일’은 한 덩어리로 묶일 가능성이 커지게 됐다. MBC가 어떤 응전 카드를 들고 나올 지 알 수 없지만, 두 언론사의 ‘활약’으로 두 사안이 엮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중앙일보>는 ‘다이어리’를, MBC는 ‘X파일’을 집중적으로 보도할수록 두 사안의 같은 본질은 부각될 것이며, 두 사안에 대한 수사에 가해질 압박강도는 그만큼 커진다.

총체적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국민 입장에서 보자면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