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안, 그리고 그의 엄마들

길에서 만난 세상 풍경

등록 2005.08.19 10:26수정 2005.08.2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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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김윤섭

디오로사 지나, 어라완, 난타폰 칸자낭굴, 삼단 우르네, 이시바시 쇼오코, 트란티 탄한….


석 자 이름에 익숙한 우리에겐 낯선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 전라남도 장흥군에 살고 있는 '한국' 여성들이다.

장흥군청 사회복지과에 이어 찾아간 곳은 장흥 공공도서관. 매주 수요일 한국으로 시집 온 외국인 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김재열(77)씨의 첫 말문이 심상치 않다.

무엇을 준비하러 온 것이 아니고 이곳에 살러왔다면 한국어부터 배워야 한다며 운을 뗀 그는 인간이면 누려야 할 '행복한 삶'에 악센트를 찍는다.

"미국 갔을 때 일입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언어 문제로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망은 행복하게 사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이제 우리가 그 시험대에 서 있습니다. 한국에 살고 싶어 찾아온 외국인들을 뒤로한 채 과연 복지국가와 세계화를 말할 수 있을까요?"

한국말을 배우는 엄마들


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한 교육자의 면모 탓일까. 김재열씨의 한국어 열정은 이미 국경을 넘어서 있다.

"이들이 먼저 한국말을 배워야, 태어나는 자식들한테 가르쳐 줄 수 있는데 순서가 바뀌었어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우지만 엄마들은 아니잖아요. 아마 이 여성들의 학력수준을 들으면 놀랄 겁니다. 최하가 고졸이고 대졸이 절반을 넘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다. 정작 한국인들은 국가가 나서서 출산장려 정책을 펴도 아이를 낳지 않는 추세지만 한국 농촌으로 시집온 아시안 여자들의 평균 자녀 수는 2명. 그 나라가 흥하려면 길쌈하는 소리, 책 읽는 소리,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아야 한다는데 사뭇 염려가 된다. 얼마 전 종교계 '고령화대책' 좌담회에서도 입모아 말하지 않았던가. 저출산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재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바로미터라고.

a 한국말을 배우는 코시안

한국말을 배우는 코시안 ⓒ 인권위 김윤섭

도서관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수업시간이 가까워온다. 만삭인 여성, 유모차를 끌고 나타난 여성, 아이를 앞세운 여성 등 피부색이 다를 뿐 한국어를 배우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이들의 낯빛이 밝다. 이들의 한국어 수업은 매주 수요일 오전 10~12시. 한 사람의 봉사로 시작된 수업은 두 해가 지나자 협조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군에서 재정 연 350만원이 나오고 있으며, 이 돈은 주로 수강생들의 교통비와 외부강사 특강비로 지출된다.

"50여 명의 학생 중 70리가 넘는 곳에서 오는 학생도 있는데 사정이 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왕복교통비였습니다.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라고 그것이 해결되고 나니까 욕심이 하나 생겼어요. 한국의 음악, 국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쌀 씻는 그릇이 쌀을 씻지 않는다, 쌀과 쌀이 서로 부딪치면서 씻긴다, 외국에서 온 이들도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김재열씨의 뒤를 따라 3층으로 향할 때였다. 누군가 서툰 솜씨로 쓴 표어가 눈에 들어온다.

'말소리 조심 발소리 조심'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정숙'이라는 단어를 되새겨본다. 갑자기 익숙하다고 생각해 온 그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한마디 말에도 들꽃처럼 피어나 엄숙함을 요하는 단어가 있음을 새삼스레 느끼며 교실로 들어서자 선생님이 한 분 더 계신다. 김재열씨의 제자라고 소개한 김두석(67세)씨. 사제지간인 두 사람은 각각 수업을 진행한다. 제자인 김두석씨가 강단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스승인 김재열씨는 뒤늦게 출발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외수업을 진행한다.

농촌의 풍경이 된 국제결혼 여성들

그날 출석한 학생 수는 어른 22명에 아이들 6명. 수업을 진행하는 김두석씨가 시험지 한 장을 내민다. 시험지에는 '정말' '혹시' 커녕'이 나열되어 있다. 어떤 말을 한정하거나 다른 말과의 관계에서 그 말뜻을 도와줄 때 사용되는 낱말들. 그때 누군가 도움을 요청한다. 한국에 온 지 4년째 되는 제넷 우반도(30)다.

얼른 다가가 시험지를 확인한다. 자신이 지은 한글 문장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미는 한 필리핀 여성 앞에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혹시 피리핀에서 왔서요?' '정말 술 안얘요?' '밥 커녕 죽도?' 이처럼 한국어 수업시간은 장터를 연상케 할 만큼 화기애애하다. 잠든 아이를 안고 수업에 열중인 여성, 칭얼대는 젖먹이에게 우윳병을 빨려주는 여성,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젖먹이를 안은 채 뒤쪽으로 빠져나와 젖을 물리는 여성 등 그야말로 한국여성의 전형이다. 오래 전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기까지 한다.

a 코시안

코시안 ⓒ 사진 김윤섭

수업시간마다 하나씩 들려준다는 능청맞은 속담도 예외가 아니다. "마누라 때린 날 장모가 왔다"는 말에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어 얼떨떨해 하더니 그 뜻의 설명을 듣더니 웃음바다가 된다. '장흥'에서 '흥부'로, '부자'에서 '자전거'로 이어지는 끝말잇기 공부에도 다들 신이 나 있다. 한껏 고조된 수업분위기 탓이리라. 기척도 없이 나타난 한 시민단체의 여성이 강단으로 나가더니 오디오의 볼륨을 높인다. 신문을 읽을 수는 있어도 그 뜻은 이해 못하겠다던 학생들이 천진스레 유년으로 돌아가 노래를 따라 부른다.

"햇볕은 고와요 나뭇잎에 들어가서 초록이 되고 봉오리 속에 들어가서 꽃이 되어요 햇볕은 고와요 온 세상을 골고루 안아줍니다~"

부르면 부를수록 뒷맛이 우러나는 이원수의 '봄시내'를 뒤로하고 자리를 옮긴 곳은 읍내 한 커피숍.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조차 입력하지 못했건만 일본에서, 필리핀에서 시집 온 여자들의 수다가 시작된다.

"한국말이 가장 힘들어요. 우리는 언니면 되는데 한국은 고모, 이모, 작은어머니… 너무 복잡해요. 음식도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한국 남자들은 조금 이상해요. 필리핀 남자들은 다 요리를 하는데 한국 남자들은 가만히 있어요. 한국 교육 못 따라가겠어요. 학원이 너무 많아요. 돈도 많이 들어요. 노래방이 가장 좋아요. '어머나 어머나'를 잘 불러요. 텔레비전은 영어도 나오고 한국말도 나오는 아리랑 채널이 좋아요. 한국말을 빨리 배울 수 있어요."

두어 차례의 상견례 끝에 한국농촌으로 시집왔다는 외국인 여성들의 수다가 잦아들 즈음 떠오른 사람은 한때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인기를 모았던 블랑카였다. "이게 뭡니까"를 통해 그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고발하는가 하면 한국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그들의 애환 언어습득, 생활고, 혼혈아를 보는 사회적 편견을 담아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했던 것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0~2004년까지 한국 남자와 결혼한 외국인 여성은 12만8762명. 이중 가장 많은 외국인 며느리들이 살고 있는 곳은 전라남도다. 지난해 전남도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도내 외국인 주부는 1953명으로 나주(198명)가 가장 많았고, 화순(195명), 순천(119명), 영암(113명), 무안(104명)이 그 뒤를 이었다. 장흥은 현재 102명. 필리핀(41명), 일본(33명), 중국(6명), 베트남(5명), 몽골(3명) 등에서 시집 온 외국인 여성 중 대부분이 가사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커피숍을 나와 아매리아 가시노(44)씨를 따라나선 건 길게만 느껴지던 여름 해가 골목 귀퉁이에 지긋이 등을 기댈 무렵이었다. 한국 엄마들이 다 알고 있는 사소한 교육정보마저도 전혀 새로운 사실로 다가올 수밖에…. 아매리아씨가 살고 있는 장흥군 대덕읍 도청리로 들어서자 빈농의 일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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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안 ⓒ 인권위 김윤섭


"한국 사람을 닮았네요"

필리핀에서 결혼식을 올린 아매리아씨가 한국에 온 건 1996년 가을. 일곱 살 위인 남편과 농사를 짓고 사는 그는 여전히 한국말이 서툴다. 농사를 짓는 탓이다. 아침 6시면 밭으로 나가 해가 저물어야 집으로 돌아오는 그의 일상은 사람들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수요일마다 있는 한국어 수업도 농번기 때는 짬을 내기 어려워 참석할 수 없다.

답답한 건 그만이 아니다. 마침 아매리아씨 집을 찾아간 그날 며느리와 의사소통이 가장 힘들다는 시어머니는 연신 우편요금에 대해 한숨을 내쉰다.

"아휴, 저것(손녀)들 사진 몇 장 지그 외할미한테 보냈는디 먼 놈에 우편값이 그리도 비싸디야. 만팔천원이나 들었당께."

시어머니의 말뜻을 알아차린 것일까. 동행한 제넷은 소녀처럼 웃는 얼굴이나 차분한 성격의 아매리아씨는 고개를 떨군다. 그러자 남편이 마당에 멍석을 편다. 어딘가 모르게 병색이 짙어 보이는 얼굴이다.

"작년에 입원을 했습니다. 갑자기 온몸이 뒤틀려서요. 농사가 많지 않아 전에는 미장일을 나갔는데 이젠 그마저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말이 통하지 않아 힘들고, 남편은 아내가 울고 있을 때 가장 힘들다고 했던가. 다행히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두 딸(은주, 은지)은 밝아 보였다. 내친김에 피부색이 다른 엄마 때문에 창피했거나 동무들한테 놀림당한 적은 없었느냐며 물어보려다 그만둔다. 두 딸한테 한국말을 배운다는 아매리아씨에게 풀잎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이번에도 입을 연 사람은 그의 남편이었다.

"아내가 울 때도 그렇지만 명절 때는 더한 것 같아요. 결혼식하고 아직 한번도 필리핀을 가보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진심어린 고백에 아매리아씨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찌 모르랴, 아홉 해가 다 되어가도록 고향에 한번 가보지 못한 그곳에 가난이 밤이슬로 젖어 있음을! 무심결에 아매리아씨는 그래도 한국 사람을 많이 닮아간다고 하자 어둡던 그의 얼굴이 금세 밝아진다. 한국에 살며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방금 한 그 말이라며. 그러고 보니 은주는 엄마를, 은지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

장흥에 온 지 사흘째, 날이 밝아오자 장흥군 ㅈ초등학교로 향한다. 전교생 166명 가운데 코시안 한국인 남성과 아시아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 학생은 16명. 교장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교장선생은 모 방송국에서 다녀간 이야기부터 꺼낸다.

"잘 적응해 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긁어 부스럼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괜히 건드려서 잘 아물고 있는 상처가 덧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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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안과 가족들 ⓒ 인권위 김윤섭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다. 그 한마디에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린다. 코시안, 그들은 어른들의 한마디에 놀라고 때론 상처 입는 아이들이 아닌가. 그렇다고 돌아설 수도 없는 일, 학교를 나와 이번에는 장평면으로 서정리로 걸음을 옮긴다.

1996년 한국으로 시집 와 두 남매를 둔 로리타비 와드와찬(43)씨는 학교에서 보낸 안내장을 이해 못해 실수할 때가 많다며 말문을 연다. 장흥에 사는 외국인 주부 가운데 두 번째로 이주해 온 고참답게 필리핀에서의 이력도 만만찮다. 필리핀 북부에서 태어난 그는 그곳에서 4년제 대학을 다녔고 두 해 동안 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일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많이 외로워요"

"아이들이 더 크면 상급학교도 보내야 하는데 교육비가 만만치 않아요. 한국음식이라도 잘 만들면 좋겠는데 그렇지도 못하고요."

종교단체 주선으로 한국을 찾은 그의 생활은 논밭을 합해 900평이 전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은 지난해 여름 산에서 나무 베는 작업을 하던 도중 다쳐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게다가 필리핀에는 없는 겨울나기가 쉽지 않다는 그는 아이들 걱정에 말끝을 흐린다.

"아이들이 많이 외로운 것 같아요. 이곳은 놀아줄 친구도 없어요."

로리타비씨가 살고 있는 마을은 39가호. 그 마을에 아이들이라곤 로리타비씨 남매가 전부다. 그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온 건 오후 4시가 넘어서다. 조금 전 찾아갔던 ㅈ초등학교와 며칠 전부터 다니기 시작한 피아노 학원을 들러 집으로 돌아온 남매는 대문을 들어서기 바쁘게 엄마를 부르며 물부터 찾는다.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켠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사진을 한 장 찍었으면 하는 마음에 30분이 넘도록 기다려도 남매는 달아나기 일쑤다. 애잔한 목소리로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엄마가 나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어쩐다지, 필리핀에 외가가 있는 아이들에게는 엄마한테 영어를 배워야 외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일본에 외가를 둔 아이들한테는 일본어를 부지런히 배워야 외할머니한테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다며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있다는 조금 전 두 담임선생님과 나눈 몇 마디가 발에 밟힌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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