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한 남자'란 말은 어딘지 이상하다. '장쾌한 여자'란 말도 어감이 썩 좋진 않다. '장쾌한 남자' '단아한 여자'로 바꿔야 비로소 말이 제 자리를 잡는다. 단어의 조합에도 나름의 어울리는 감각 군락이 있듯이 정자 원림에도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구성의 기본 감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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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쇄원 입구 왕대 숲의 도열. 대밭 무단출입을 막으려는 울타리가 눈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쉽다. ⓒ 곽교신
그러나 소쇄원은 담양 주변에 산재하는 많은 정자 원림이 공통적으로 갖는 감각에서 혼자 떨어져 있다. 그 동떨어진 분위기는 개창자 양산보의 개인적인 아픈 기억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즉 어린 나이에 기묘사화를 겪으며 현실 정치의 비정함에 환멸을 느끼면서 낙향하여 꾸미기 시작한 원림이었기에 형성된 원초적 외로움이 바로 동떨어진 분위기로 나타난 것인지 모르겠다. 양산보는 스승 조광조가 사약을 받는 것을 본 인간적 허무로 자연의 탐미주의에 빠진 것 아닐까.
담양 인근의 여러 정자 원림 중에서도 소쇄원이 특별한 감각을 주는 이유는 소쇄원이 뿜어내는 특별한 향기에서 비롯한다. 그 특별한 향기의 근원은 어디에서나 보이기에 결코 특별하지 않은 대나무요 물이요 바위이며 햇빛이고 바람이다. 어디에나 있는 재료로 어디에도 없는 향기를 만드는 소쇄원이기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데도 갈 때마다 새삼스럽다.
여자 옷을 입은 단아한 남자
몇 번을 가보아도 소쇄원은 남자다. 그런데 '단아한 남자'다. 소쇄원이 들어앉은 담양군 남면 지곡리 계곡의 겉으로 드러나는 분위기는 분명 남자이되 계곡에 입혀진 옷(인공의 흔적들)은 어떤 각도로 봐도 여자다.
여자 옷을 입은 남자라면 어딘지 기분이 찜찜하면서 유쾌하지 않아야 하는데 '단아한 남자' 소쇄원은 그렇지 않다. 이름이 소쇄(瀟灑 깨끗함과 시원함)해서인가. 소쇄원에 남자 옷을 입혔다면(호방한 기상으로 조경을 했다면) 아마도 평범한 정자 원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소쇄원에 담장이라고 서 있는 것은 세우다 중지한 듯 모두 끝이 터져 있다. 건물을 빙 둘러 막는 것이 담장의 상식이니 소쇄원 담장을 처음 보면 의미와 용도가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계곡 물줄기를 90도로 막아섰으면서도 물은 물론 사람까지도 드나들도록 담장 밑을 훤히 터놓은 '오곡문'을 보면서 "아 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소쇄원의 담장은 무엇을 막기 위한 담장이 아니라 무언가 들여놓기 위한 담장이다. 담장이 산을 막은 것이 아니라 쌓다 그친 담장이 산을 더 절제된 모습으로 바꿔 소쇄원 안으로 들여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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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물은 쪼갠 대나무를 타고 연못 가장 안쪽 구석으로 떨어지며 중앙부를 거쳐 밖으로 흘러 연못물은 항상 자연스럽게 신선하다. ⓒ 곽교신
시선은 적당히 막아 마음의 평온을 주되 물 흐름은 막지 않는 오곡문과, 그 물의 일부가 쪼갠 대를 타고 흐르는 듯 마는 듯 대봉대 연못으로 졸졸 흘러드는 것을 보면, 소쇄원이라는 원림 구성의 기본 질서가 확연히 다가온다.
속마음으로는 "좋아요"했으면서도 겉말로는 "싫어요"하는 여자의 마음이 소쇄원 조경에 숨어 있다. 말로는 "싫다"고 할 때도 눈빛은 "싫지 않아요"하는 미묘한 여성적 감성을 소쇄원은 물과 대나무와 담장만으로도 은은히 그려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조형물들이 섬세한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보이고, 전체 원림의 느낌은 확연히 남자인 것은 갈 때마다 느끼는 알 수 없는 조화다.
그 '알 수 없는 조화'는 개창자 양산보의 세상에 대한 분노와 충격을 생각하면 조금씩 이해가 간다. 양산보는 세상을 버리려 소쇄원에 숨어든 것이 아니라 17살에 소쇄원에 들어온 이래 평생 세상을(사람을) 다시 사랑하려 애쓰다가 타계하지 않았을까.
원림 내에 여자와 남자를 섞어 놓았기 때문인지 소쇄원에서는 마음이 넉넉해진다. 보통의 정자 원림에 가면 남성 또는 여성만이 느껴져 상대적으로 부족한 음기나 양기를 채워 넣어야 될 것 같은 일종의 초조가 있는데, 소쇄원에서는 그 초조가 없는 넉넉하고 풍성함에 마음도 고요해진다.
그래, 나 무식해! 소쇄원 모르거든?
소쇄원은 우리나라 원림 조경 정신의 표본이다. 건축학 조경학 국문학 미학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소쇄원과 소쇄원을 거친 사람들을 상세히 알지 않고는 그 학문을 세밀히 완성했다고 말하기 힘들 만큼 소쇄원의 내재 가치는 크다.
그 가치에 걸맞게 무수한 논문을 쏟아내게 한 원림인 만큼 소쇄원에 가면 스스로 무지(無知)가 느껴지면서 공연히 주눅이 들기도 한다. 당대의 명문장가치고 소쇄원을 읊지 않은 이가 없다는데 소쇄원 찬가 한 편을 제대로 모르는 자신이 한심해진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보이는 만큼만 알고 오겠다는 배짱도 답사의 한 방편이다. "그래, 나 무식해! 소쇄원 모르거든? 그래서 어쩔건데?"의 2005년식 대사는 이미 조선 중종 때 양산보에 의해 소쇄원에서 역설적으로 통하기 시작한 말투였으니 그 추정의 근거가 제월당(霽月堂)이란 당호(堂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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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람객이 여유를 부리게 만드는 제월당의 마술. 방을 한 곳으로 몰아붙여 누마루가 앞뒤로 시원히 터져 은밀한 느낌이 없어서 돌계단을 오를 때부터 만만하게 덤벼진다. ⓒ 곽교신
제월(霽月)은 흔히 '비 개인 하늘의 맑은 달'로 풀이되고 말지만 '마음 속에 맺힌 것이 없는 산뜻한 마음'이 원래의 속뜻이다. 즉 '맑은 달'은 고도의 은유다. 산뜻한 마음은 감쪽같이 숨기고 달만 드러내면서 "난 모르겠거든?"하는 양산보식 상쾌함이 제월당 당호에 있다. <제월당> 삼음절엔 온 세상이 들어 있다. 바로 이 제월당에서, 소쇄원으로 숨어들어 세상과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이다가 54세로 타계한 양산보의 깊은 뜻이 읽혀진다.
사약을 받는 스승을 보며 느꼈을 17세 소년 양산보의 충격과 회한, 정적에게 사약을 내려 기어코 숨을 끊어놓는 정치권력에 대한 거대한 분노를 삭여 결국은 소쇄원에 모두 묻고 갔을 것이라고 제월당 당호의 뜻을 생각하며 굳게 믿는다. 그 믿음은 내키지 않는 억지 믿음이 아니라 자연스런 수긍이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제월당을 소쇄원 내에서 가장 뒤쪽에 앉히고 광풍각과도 담장으로 공간을 나눈 뜻도 몇 번 다녀오고서야 눈에 들어왔다. '제월'이 "증오를 모두 버렸을 때 얻어지는 산뜻함"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제야 소쇄원이 넓은 품을 가진 완전한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물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무서운 침묵만이 느껴지던 소쇄원에서 <디쎔버>(December.George Winston의 82년 앨범)에 실린 '캐논 변주곡'이 들리기 시작한 것도 세 번쯤은 방문했을 때였다.
볼륨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아도 사르르 음량이 높아지다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소리가 사위어지면서 맑은 그릇에 물 한 방울 조용히 떨어지는 소리로 끝나는 그 피아노 소리가 소쇄원 어디엔가 곱게 숨어 있다가 다음에 오면 다시 들릴 것 같은 착각은 이번 방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양산보 할아버지가 넓고 낮고 편안한 음성으로 듣고자하는 사람에게만 들려주시려는 이런 말씀이 아닐까.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아…"
돈 많은 양반이 돈 잔치하자고 지은 풍류가객의 놀이터가 아니었기에 소쇄원은 그 정신의 깊이가 무궁하다. 대봉대에서 모든 소쇄원 방문객을 봉황으로 예우한 양산보의 속내만 생각해도 소쇄원이 당대에 유행처럼 번진 고식적 의미의 은둔을 고집한 곳이 아닌 것을 확신한다.
결국, 품이 넓으면서도 '단아한 남자'는 세상에서 알아주진 않았으나 지닌 뜻이 곱고 맑았던 '17세 소년 양산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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