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대나무가 중국산에 점령당했다?

[담양 주변의 정자 6] 담양은 계속 죽향이어야 한다

등록 2005.08.30 17:07수정 2005.08.3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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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정자치고 대나무를 끼고 있지 않은 곳은 거의 없지만 담양 주변 정자들이 내는 분위기는 유난히 대나무와 궁합이 맞는다. 환벽당 식영정 면앙정의 대나무는 조경에 양념처럼 둘러선 정도이지만 소쇄원에서는 장쾌한 왕대숲으로 아예 원림 전체가 대숲에 묻혀 있다. 왜 담양의 정자 원림엔 대나무가 빠지지 않을까.

대나무 사철 푸른 잎과 쭉쭉 뻗은 줄기는 지조의 상징이다. 대나무는 매란국죽의 사군자 중에서도 올곧은 선비 정신의 첫째로 여긴다. 이러니 세상 욕심을 버린 은둔처를 표방하는 정자 원림과 어울릴 나무로 대나무 이상이 있을 리 없다.


소나무도 사철 푸르러 정절(挺節)의 상징으로 치지만, 소나무가 '침묵의 지조'라면 대나무는 '행동하는 지조'의 느낌이 있다. 끝을 예리하게 사선으로 쳐낸 '죽창'은 난리가 있을 때마다 무기로써 실제 효능 이상으로 민초들의 결연한 의지를 과시했다.

유럽의 이른바 '행동하는 지성'이었던 사르트르가 레지스탕스로 나치 제국주의에 저항할 바로 그 무렵에, 이 땅의 민초들도 조선과 신생 대한민국을 거치며 제국주의 일본과 외세에 저항하며 생존을 지켰고 그 때마다 죽창으로 민초들과 함께 한 '행동하는 지조' 대나무는 우리에겐 단순히 나무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담양은 아직도 죽향인가

a 2003년에 문을 연 담양군 직영 죽림욕장 '죽록원'은 대밭 넓이만 오만 평이다.

2003년에 문을 연 담양군 직영 죽림욕장 '죽록원'은 대밭 넓이만 오만 평이다. ⓒ 곽교신

담양을 '죽향(竹鄕)'이라 부른다. 마을마다 병풍처럼 대숲을 둘러쳤으니 대밭이 흔한 전남에서도 그 면적이 제일이어서 전국 대밭의 25%가 담양군에 몰려 있다. 대밭이 많기도 하지만 생육 조건이 특이한 대나무에 적합한 기후로 죽질(竹質)이 뛰어나 담양 대로 만든 죽물은 때깔이 곱고 감촉도 좋아 담양은 죽세공엔 천혜의 지역이다. 역사도 길어 담양에서 죽세공예를 시작한 기록은 임진왜란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질 좋고 풍성한 대나무와 오랜 기술 전통을 기반으로 담양엔 우수한 죽물이 흘러넘쳤다. 플라스틱이 없던 시절의 대나무는 만사형통의 재료로 못 만드는 것이 없었으니, 인근에서 만들어진 갖가지 죽물이 담양 죽물시장에 모였다가 전국으로 나갔고 따라서 담양엔 대나무로 거둔 돈이 흔해 든든한 경제문화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80년대 초까지도 담양 죽물시장은 흥청거려서 "대나무로 돈을 긁었다"는 말은 아직도 상인들 사이에선 즐거운 추억이다.


a 올 봄 시장에 나온 중국산 키(오른쪽). 도저히 구분이 불가능한데 가격은 국산이 1만7000원, 중국산이 6500원이다.

올 봄 시장에 나온 중국산 키(오른쪽). 도저히 구분이 불가능한데 가격은 국산이 1만7000원, 중국산이 6500원이다. ⓒ 곽교신

그러나 지금은 죽물을 담양의 대표적 지역 상품으로 부르기엔 현실이 부끄럽다. 유명한 새벽 죽물시장은 물론 죽물이 산같이 쌓여 죽물더미가 만든 미로 사이로 사람이 다니던 5일장 죽물터는 사진으로나 보는 일이다.

85년경 대나무 자리를 시작으로 대도시를 장악하기 시작한 중국산 죽물은 종류를 기하급수로 늘리며 죽물의 본향 담양까지 "완전 점령"했다. 지금 담양 읍내 죽물 가게를 채운 상품은 90% 이상이 중국산이다. 95% 이상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상인도 있다.


아무리 국경없는 글로벌 경제시대라 하지만 담양의 자존심인 죽물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중국산이 값이 매우 싸다. 가격에 비해 기능성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자들의 손이 국내산보다 중국산으로 갔고 이젠 도저히 중국산을 당해낼 도리가 없어 보인다. 아예 우리 죽물을 중국으로 들고 가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주문해 전량 수입하는 일이 흔해서, 크기와 디자인이 판박이인 상품이 즐비하다. 이렇게 특정 제품의 판박이 상품이 나오면 그 제품의 원형인 국내산 제품은 상인들 말로 "죽어 버린다".

한 자리에서 30년째 죽물 가게를 연다는 박아무개(60)씨는 "이제 국내산은 몇몇 제품 빼고는 거의 다 죽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회생 가능성을 얼마나 보느냐는 질문엔 손사래를 치며 대답 대신 두 개의 상품을 내 보인다.

a 삼단찬합. 왼쪽이 중국산. 오른쪽이 국내산. 한 눈에 봐도 대오리 결은 맵시가 다르다. 그러나 가격이 문제다.

삼단찬합. 왼쪽이 중국산. 오른쪽이 국내산. 한 눈에 봐도 대오리 결은 맵시가 다르다. 그러나 가격이 문제다. ⓒ 곽교신

사진 왼쪽 중국산은 1만2000원에 판다. 그러나 오른쪽의 국내산은 6만5000원이다. 그것도 마진을 낮게 매겨야 그렇다. 물론 이 상품은 가격 차이가 아주 높은 경우지만 다른 것도 두 배 차이는 보통이니 소비자는 싸서 찾고, 판매자는 잘 팔리니 들여놓고, 생산자는 안 팔리니 안 만든다. 담양에서 국내산 죽물이 사라진 이유는 이렇게 아주 간단하다. 시장의 95%를 중국산에 점령당한 담양은 이제 이름만 남은 '죽향'이다.

담양 죽물이 살아날 길은 정말 없을까? 있다!

담양에서 마지막까지 중국산 죽물 판매를 거부하다가 큰 손해를 보고 가게문 닫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중국산을 팔기 시작했다는 한 상인에게서 새로운 말을 들었다. "안 팔리니 안 만든다는 말은 모르는 소리"라는 것. 다소 비싼 가격을 매겨야함에도 불구하고 국내산은 있으면 소량이나마 있는 대로 거의 다 팔린단다. 비싸더라도 온전한 국내산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로, 한 마디로 공급이 안 되어 못 판다는 것이다.

국내산 죽물이 없어서 못 판다?

전혀 의외인 이 말의 속 내용이 궁금해 말하길 꺼리는 것을 채근하듯 붙잡고 늘어지니 마지못해 풀어놓는 상인의 말은 "만드는 사람들이 배가 부르다"는 것으로 요약되었다.

즉 중국산과 질적으로 경쟁해보겠단 장인정신으로 죽물을 만드는 이들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참빗장(匠) 등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이들이 만드는 고가의 "작품"말고 일반 판매용 상품이지만 대오리를 가늘게 결어 비단결 같은 죽물을 내던 불과 얼마 전까지의 장인정신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 만들어 놓기가 무섭게 소매상인들이 가져가니 제작자끼리 판로 경쟁이 심하던 예전처럼 열심히 만드는 이도 없다고 한다. 만드는 이에게 가끔 막걸리잔이라도 돌리고 명절 때 꼬박꼬박 인사라도 하고 물건 값도 선금을 쥐어줘야 겨우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 60대 후반 이상인 제작자들이 아둥바둥 돈을 벌 이유도 없고, 배짱부리며 놀이삼아 만들어도 용돈치곤 두둑이 들어오니 생산 효율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후계자 양성인데, 돈이 되는 일인데 젊은층에서 왜 덤비지 않느냔 질문엔, 손끝에 노련한 기술이 밸 때까지 오랜 기간 끈질기게 배울 젊은이가 있겠냐고 한다. 담양군에서 매달 교육수당까지 줘가며 죽물 기능후계자를 양성하는 군 자체 프로그램이 있으나 전문성 부족으로 운용의 효율성엔 의문이 갔다.

a 세계 유일이라는 담양의 '한국대나무박물관'

세계 유일이라는 담양의 '한국대나무박물관' ⓒ 곽교신

중국산 죽물과의 경쟁 문제가 워낙 어려워서 그런지 '대나무박물관'도 죽물의 명성 회복에는 적극적인 대책이 없어 보이며, 담양군 부설 '대나무 연구소'도 대나무 성분의 효능을 이용한 웰빙 상품 개발에만 주력한단다.

그러나 담양군이 많은 예산으로 사유지였던 대밭을 사들여 '죽록원'을 운영하고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을 시도하는 것을 보면 담양군이 죽물의 옛 명성 살리기에 백기를 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아직 요원해 보이지만 이런 노력은 죽향 담양을 되살리는 하나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물건만 있으면 국내산이 팔린다는 죽물거리 상인의 말은 '담양 죽물 활로에 탈출구가 없다'는 말이 행정기관의 책상 위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담양은 계속 죽향이어야 한다

중국산 죽물이 점령군처럼 판치는 담양을 보노라니 어쩐지 패전국 거리 같아 우울하다. 그래서 그런지 죽림원의 대나무들도 "담양은 죽향!"이라 우기기 위해 마지못해 서있는 듯 힘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대나무(즉 죽물)에서 힘이 빠진 담양이면 곳곳의 보석같은 문화유산인 정자 원림도 제 빛을 내기 힘들다. 가사 문학의 낙천성과 소쇄원의 칼날 같은 선비정신이 대나무 숲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담양 대나무는 그야말로 예사 대나무가 아닌 것이다. 예전에 그 대나무에 도도한 선비 정신이 흘렀듯이 지금도 도도한 바람이 느껴져야 한다. 그래야 정자 원림의 정신도 제대로 흐른다.

선비 정신의 보금자리였던 대숲이 지켜져야 하듯 담양의 자존심인 죽물도 어떤 방법으로든 예전의 명성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담양의 대숲이 어디 예사 대숲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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