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정말 예쁜 여자 명옥헌

[담양 주변의 정자 3]정자 원림의 보석 명옥헌

등록 2005.08.17 21:20수정 2005.08.1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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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이 없는 명옥헌(鳴玉軒)을 처음 방문했던 오래 전 어느 늦가을, "여긴 정자의 별(星)이다. 그리고 이 원림(園林)은 여자다"라고 혼자 중얼거렸었다. "예쁘다, 정말 너무 예쁘다"를 수없이 중얼거리다 온 기억 뿐이니, 혼자 가길 다행이었지 여자와 동행했다면 "그렇게 예쁘면 얘하고 놀아!" 하고 삐쳐서 가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집 주변에 둘러친 담장은 외인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이는 영역을 지키려는 동물적 본능이기도 하다. 환벽당의 아름다움이 높이 둘러친 돌담장에 반 이상은 묻혀버렸듯이, 원림에 담장을 둘러치는 순간 거긴 고관의 저택이지 본질적 의미의 정자 원림이 아니다. 명옥헌의 가장 큰 매력은 눈에도, 마음에도 없는 담장이다.


명옥헌을 찾은 답사객들은 자신의 일정에 맞춰 체류 시간을 안배하고 오겠지만 대개는 예정했던 시간을 넘겨 머물다 가곤 한다. 그리고 떠날 때 거의 비슷하게 한 마디씩 하는 걸 듣는다.

"우리 언제 꼭 다시 오자!"

자연미에 흔적없이 얹어놓은 인공미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의 원림 명옥헌을 적절히 설명할 말은 딱 하나다.

"정말 너무너무 예쁘다."


a 꽃구름 속에 잠긴 명옥헌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위치. 정열이 붉게 흘러넘치는데도  흐드러지거나 가볍지 않고 단아한 느낌만을 주니, 그저 망연히 바라보게 만든다.

꽃구름 속에 잠긴 명옥헌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위치. 정열이 붉게 흘러넘치는데도 흐드러지거나 가볍지 않고 단아한 느낌만을 주니, 그저 망연히 바라보게 만든다. ⓒ 곽교신

대부분의 정자에서 느끼는 호방한 기상은 여지없이 호쾌한 남자를 연상하게 하는데 이 명옥헌만은 여자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좁은 마을 안길을 따라 가다가 길 끝이 훤히 터지며 나타나는 명옥헌을 보고, 열이면 열 "야---!" 하고 탄성을 지른다. 이유는 오로지 "너무 예쁘기 때문"이다.

조선의 정원은 최소한의 인공 조경만을 고집한다. 그러나 명옥헌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거의 인공이요 가공이다. 당호의 근원이 된 계류(溪流)도 흐름을 바꾸고 조작한 인공이요, 고목으로 명옥헌의 상징이 된 배롱나무도 공들여 심고 가꾼 것이다. 명옥헌의 가공 흔적은 모조리 숨어 있어 어디까지가 인공이고 어디부터 자연인지 구분이 어려우니, 이쯤 되면 인공도 자연의 일부다.

이젠 계류를 누르고 명옥헌의 상징이 된 해묵은 배롱나무의 희고 매끄러운 피부는 남자는 늑대 본성의 흑심에, 여자는 부러움섞인 질투에 슬쩍 만져보게 한다. 맨살같이 보드라운 줄기를 살살 간질이면 잎이 움직인다는 속설을 들려주면 답사객들은 괜히 낯을 붉힌다.


a 방안에서 멀리 바라보는 연못가 배롱나무. 무슨 말이 필요하리...

방안에서 멀리 바라보는 연못가 배롱나무. 무슨 말이 필요하리... ⓒ 곽교신

비틀고 뒤꼬인 줄기와 가지의 교태는, 마치 고개만 살짝 돌려 가늘게 뜬 눈으로 새침하게 바라보는 여인의 자태 그대로이니, 그 천스럽지 않은 요염의 극치가 '곰같은 마누라'보다 나아도 한참 나을 터. '곰하고는 못살아도 여우하고는 산다'는 말이 있지만, 명옥헌에선 '곰하고는 못살아도 배롱나무와는 살겠다'로 바꾸고 싶을 지경이다.

붉은 꽃을 달고 흰 몸줄기를 제 잎으로 만든 반그늘에 숨기고 서 있는 배롱나무를 보면, 잠자리 날개 같은 모시 저고리 뒤에 숨어 땀이 송송 솟은 여인의 여름 어깨를 보는 듯하다. 제 아무리 목석 같은 남자라도 8월의 명옥헌에서까지 야릇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남자 구실 하긴 힘들다.

이 요염함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여름에 절정을 이룬다. 백일을 붉게 핀다고 '백일홍나무'(연음하여 '배롱나무')이나 실제로 백일 동안 꽃이 피진 않는다. 다만 나락이 나오면 피기 시작해 여름내내 흐드러지다가 벼가 익는 초가을까지 피는 꽃이니, 꽃송이가 아닌 나무 전체를 보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무색하게 오래 피는 꽃임엔 틀림없다.

이러한 분위기의 명옥헌이기에 아들(오명중. 吳明中)이 벼슬을 버리고 근처에서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던 돌아가신 아버지(오희도. 吳希道. 선조 때 문신)를 생각하며 지은 정자란 기록에 의문이 가는 것이다. 망칙스런 생각까지 들도록 이렇게나 아들이 선친의 춘정(春情)을 자극해야 했다면 이유가 그럴 듯할텐데 그런 쪽으론 비슷한 기록도 안보인다.

다만 문중에서 내세우는 효자이자 당대의 풍수대가였던 오희도가 이 마을의 센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나무를 많이 심었으니, 아버지 돌아가신 50년 후 지은 명옥헌의 큼직한 연못도 화기를 누르려는 뜻과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어쨌던 명옥헌에 가서는 어려운 운자(韻字) 써가며 한시를 자랑할 일도 없고 가사를 모른다며 짧은 지식 탓할 필요도 없다. 그저 예쁘다는 소리를 지겹도록 하다 오는 것이 명옥헌이란 예쁜 여자에게 제대로 하는 대접이다.

자연음의 오디오가 내는 물소리를 만나야

명옥헌을 찾을 때마다 연못 오른쪽 보다는 왼쪽 길(사실 제대로 된 길은 아니다)을 따라 올라간다. 그리 걸으면 물소리를 제대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옥헌 보다 조금 높은 자리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어 계류가 그리로 먼저 들고, 넘치는 물이 자연스레 아래 쪽 큰 연못으로 흘러든다.

명옥헌 조경의 주제는 계곡 물과 배롱나무다. 계류와 배롱나무를 빼면 명옥헌은 그저 그런 정자에 지나지 않는다. 당호의 울 명(鳴)과 구슬 옥(玉)은 오로지 계류를 지칭함이다. '구슬이 굴러가는 맑은 소리가 들리는 정자', 이 얼마나 예쁜 이름인가. 그러니 명옥헌에 가서 계류를 눈여겨 보지 않고 오거나 물소리를 못 듣고 왔다면 팥없는 붕어빵을 먹고 온 셈이다.

물소리를 크게 들을 요량으로 계류를 위 연못으로 끌어들였다가 다시 아래 연못으로 흐르게 했으니, 이 인공의 물길은 그저 물의 통로가 아니라 물이 돌을 걸치고 돌아 흐르며 소리가 커지도록 만든 '자연음의 오디오'다. 여기에 시각을 더하고자 연못가와 정자 주변은 온통 배롱나무로 뒤덮은 것이다. 세상 어느 나라의 어떤 정원이 이렇도록 청각과 시각을 절묘하게 배합했을까. 이 원림의 축조자 오명중은 수목(水木)의 코디네이터요, 자연음의 음향연출가이며 정원미의 위대한 큐레이터다.

정자를 짓고 못을 파는데 돈 잔치 좀 했을 것이다. 또 못을 파고 집을 짓느라고 민초들이 고생 좀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맛이 흡족하면 음식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본전 생각이 안나듯이, 이 예쁜 명옥헌을 담장 하나 없이 정자 내실까지 무료로 개방하는 데는 그런 생각은 저 만치 멀리 달아난다. 오히려 이런 눈 호사 귀 호사를 거저 시켜주는 조상과 후손에 감사한 마음 뿐이다.

명옥헌이 현재 누구의 소유인들 상관있으랴. 아끼고 사랑하면 내 정원이요 내 정자다. 사람이나 집이나 어디에 있던,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것임은 자연의 이치다.

비에 젖어도 꽃은 피고

이틀 연속 찾았던 이번 취재에 명옥헌은 뜻밖에 황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 그친 저녁 무렵에 찾았던 첫 날, 명옥헌 배롱나무들은 막 목욕을 마쳐 물기가 덜 가신 싱그러운 모습으로 서서 오랫만에 찾은 연인을 부끄럽게 맞았다. 거대한 스프레이로 원림 전체에 살짝 물을 뿌리는 상상을 했었을 만큼 이 모습은 무척이나 보고싶어 하던 모습이었다.

어제 보았다고 오늘은 보고 싶지 않으면 진정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다. 눈앞에서 멀어졌어도 모든 것이 연인을 투영해 뒤로 보여야 진정한 사랑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불현듯 또 생각나고 보고 싶은 아름다운 원림, 모든 이를 자기 안에 조용히 가두는 아름다운 여자 명옥헌.

비에 젖어도 꽃은 피고, 구름 가려도 별은 뜨니, 어느 이름 모를 낮선 곳에 날 혼자 두진 않겠죠. / 이안 노래 <물고기 자리> 중에서.

작년에 '물고기 자리'를 처음 듣자마자 귀에 박혀 며칠을 웅얼거리는데 뜬금없이 가사 속에 명옥헌이 연하게 오버랩 되던 희한한 기억이 있다. 그건 아마도 이어지는 뒷 가사 때문이었으리라.

저기 하늘 끝에, 떠 있는 별처럼, 해 뜨면 사라지는 그런 나 되기 싫어요.

명옥헌은 현실의 담장은 거절했지만, 별 같은 아름다움으로 방문했던 이들을 가두는 상상의 담장을 쳤다. 많은 이들이 그 담장에 갇혀 해가 떠도 사라지지 않는 별 명옥헌을 또 찾을 것이다. 십 년이 넘도록 외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치는 예쁘고 예쁜 여자 명옥헌. 기자는 담양 주변 정자 원림 중 최고의 미녀 명옥헌을 "미쓰 원림"이라고 부른다. 매우 응큼하게도….

덧붙이는 글 | 명옥헌에서만 사십여 컷을 찍어왔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성에 차는 사진이 없어 재주를 탓하며 땅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지극히 그리워하는 마음을 만족시킬 사진은 있을 리가 없다는 평범한 이치를 깨닫고, 상상을 돕는 최소한의 영상만을 두 커트 실었습니다.

9월까진 꽃이 아름다운 단아한 여자를 직접 가서 만나보는 기회가 있으시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명옥헌에서만 사십여 컷을 찍어왔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성에 차는 사진이 없어 재주를 탓하며 땅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지극히 그리워하는 마음을 만족시킬 사진은 있을 리가 없다는 평범한 이치를 깨닫고, 상상을 돕는 최소한의 영상만을 두 커트 실었습니다.

9월까진 꽃이 아름다운 단아한 여자를 직접 가서 만나보는 기회가 있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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