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세상에서도 인간은 끝내 아름답다"

작가 김훈 문학 강연회에서

등록 2005.08.24 06:37수정 2005.08.2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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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희

"빗살무늬란 인간이 느끼는 조형의 아름다움을 최초로(물론 그 이전에도 더러 있긴 했지만) 토기에 표현한 물증이죠. 빗살무늬 토기란 우리나라 전국 어디서나, 전라도에서도 경상도에서도 나오는 신석기 시대 토기인데 진흙을 구워낸 수준 낮고 깨지기 쉽고 조악한 것이죠.

그 토기 표면은 수직도 수평도 아닌 사선이 75도로 그려져 있죠. 왜 빗금을 그었을까? 수직이나 수평이 아닌 사선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45도도 아닌 75도를 왜 내리그었을까? 인간의 대부분이 오른손잡이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리긋는 것이죠. 75도란 인간이 가장 편안하게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는 각도이고 이것은 인간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고 아름다움이죠."


작가 김훈은 담담하게 <빗살 무늬 토기의 추억>(문학동네)을 예로 들어 "인간은 끝끝내 아름답다"를 풀어나갔다. 지난 19일 파주시립중앙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고 원희석 시인 7주기 추모 작가 김훈 초청 문학강연회'에서 시종일관 그가 강조한 것은 '인간의 아름다움'이었다.

원희석 시인과 작가 김훈

이번 강연회를 주최하는 행사자의 한 사람으로 강연회 시작 30분 전, 약속장소인 파주시청 앞에서 작가 김훈을 만나 강연회장으로 안내하기 위해 가면서도 내심 걱정이 태산 같았다. 공식 초청장도 내지 않았고 오직 문학을 좋아하고 관심 있는 사람들만 오기를 바랐다. 그래야 진정한 문학강연회라는 생각에 파주시립중앙도서관과 지역문학인 동호회, 학교 문예반 등에만 홍보했기에 얼마나 모여들지가 의문이었다.

보통 학술 세미나나 포럼 행사장에 사람 동원을 하지 않고 스스로 모이는 사람이란 많아야 고작 3~4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행사관계자들이라는 걸 한두 번 겪어 본 게 아니다. 각종 행사를 치르다보면 청중동원이 가장 걱정거리이며 문제다. 파주시라는 지역사회에서 순수문학 강연회에 과연 자발적으로 얼마나 모여들 것인가.

"내가 이 말도 되지 않는 詩를 쓰게 된 이유는 순전히 나의 동업자의(그는 나의 직장 문화부에 근무하는 자다) 술주정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대략 시집 한권 분량인 70편정도(사실은 69편을 생각했다. 69라는 숫자가 숨기고 있는 의미도 있고 해서)를 쓸 각오로 2월 말경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내친 김에 끝나는 데까지 쓰고자 한 것이 불과 한 달 보름 만에 100여 편이 넘어서고 말았다. " -원희석 시 메모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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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희

원희석 시인과 작가 김훈은 한국일보에서 함께 재직했었다. 김훈의 술주정으로 시를 썼다는 원희석 시인은 시 습작기간 동안 쓴 시를 김훈에게 보여주고 어지간히 구박받았던 모양이다. 그의 신랄한 비평에 더 열이 받아 시를 썼던 원 시인이 1987년 문학사상에서 시인으로 등단하며 시인의 길을 걸었고 질긴 인연은 이렇게 계속되는가.


작가 김훈은 원 시인의 스승 정진규 시인이 "그놈(원희석) 출판기념회만큼은 내가 해줘야 한다"며 인사동 시인학교에 마련한 유고 시집 <오전 10시에 배달되는 햇살>(민음사) 출판기념회에서 시평을 하기도 했다.

유고시집 출판기념회 기사를 내가 썼고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생각해보면 죽은 원희석 시인의 인연으로 두 번째 그를 만나게 되는 셈이다. 이번 추모 문학 강연회는 문우이자 지기였던 배문성 시인이 주선했고 그도 이 인연의 고리에 꿰어 파주까지 왔다.


"어떤 식으로 강연회를 알렸습니까?"

내 걱정을 알아차린 듯 강연장으로 가는 도중, 내심 그도 지역사회의 순수문학 강연회에 어떤 사람이 모일지 궁금했는지 이렇게 물었다.

"일체 초청장은 내지 않았고 도서관과 파주문인협회를 통해 알렸고요.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와야 하기에 그런 면으로 집중 홍보 했지요…."

강연 시작 5분전에 도착한 시립도서관 강당에는 200여 명의 청중이 꽉 차 있어 내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이 증명되자 한 시름 내려놓았다. 서점을 경영하는 문인협회 회원의 협조로 마련한 저자 책 판매도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준비한 책 <칼의 노래> <현의 노래> <개> 60권이 동이나 버렸다.

a 김훈의 문학강연회를 들으려는 청중이 250 석의 강당을 거의 메웠다.

김훈의 문학강연회를 들으려는 청중이 250 석의 강당을 거의 메웠다. ⓒ 한성희


억누르고, 더럽다, 할지라도 살아볼 만한 희망은 인간

"나는 직업이 소설가이고 그 임무는 오직 하나,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언어로 증명하는 게 의무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이 주제가 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더러움과 아름다움을 통틀어 드러내는 일이죠."

김훈이 사는 일산신도시 집 근처에는 동네의 자랑거리인 고등학교가 있다고 한다. 그는 가끔 그 고교에 가서 500여 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풍경을 바라본다. 등굣길에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모습, 아침햇살이 자전거 바퀴에 빛나는 풍경, 한 아이가 웃으면 급속도로 동시에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동네 가득히 울려 퍼지는 생명의 아름다움이 그에겐 동네 자랑거리다.

"그 학교에서 수능시험을 치르는 날이 되면 아침 6시에 일어나 나가서 입장하는 모습을 봅니다. 수험생을 응원하려고 새벽 3시부터 와서 자리 잡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엿이나 찹쌀떡을 붙여놓고 좋은 성적을 거두기를 바라는 모습도 보이죠."

수능이란, 어른이 청소년인 고3 아이들을 일련의 성적순으로 한 줄로 세우는 것이고 수능고사장이란 '도살장'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시험을 보고 나온 아이가 아무리 시험을 잘 봤다고 해도 대학이 수용할 수 있는 정원의 인원만 잘라내 버리고 나머지는 내버리는 '지옥의 풍경'이 '도살장'에서 일어난다.

"나는 여기서 엿을 붙이고 새벽부터 나와 격려하는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광경을 봅니다. 이 지옥의 풍경에서도 인간의 아름다움은 더러움과 한 덩어리로 분리되지 않죠. 억누르고, 더럽다, 할지라도, 이 아름다움은 인간의 희망이며 한 번 살아볼 만한 거죠. 수능고사장 풍경과 정물(토기의 빗살무늬)은 인간과 정물의 관계이자 사회적 아름다움입니다."

그에게 정물은 형태가 있으며 공간에 있고 사회적인 아름다움이라면 음악은 아무런 형태도 없는 시간이며 순수예술의 극치다. <빗살 무늬 토기의 추억>이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과거 속 조형물이라면 <현의 노래>는 미래의 시간이며 소리다.

시간의 알갱이는 인간의 축복

"2천년 전에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었을 때, 완벽한 소리의 시스템인 우주를 만들었기에 12줄에 우주의 시간과 흐름은 다 들어갔습니다. 북한에서 가야금을 개량했다 해도 완벽한 12줄 소리의 기본 시스템에 한 줄씩 더 박은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른손으로 가야금 줄을 퉁기고 '띵~'소리가 나는 2, 3초 후에 그 소리는 사라진다. 소리는 발생하고 소멸하며 덧없는 2, 3초 간 공중에 머물러 연주자는 다른 줄을 또 뜯어야만 한다. 기타와 같은 족속인 가야금과 달리 해금과 같은 족속인 바이올린은 연주자가 줄을 밀고 끌고 소리를 연장한다. 클라리넷, 대금, 나팔 같은 관악기는 인간의 호흡을 밖으로 연장시키며 소리를 낸다. 그는 악기와 소리의 연결과 단절을 이렇게 분석하면서 성악은 그 자체가 몸이라고 말했다.

"가야금은 2, 3초지만, 바이올린, 대금 등의 연주는 끌고, 밀고, 호흡해서 연장할 수 있지만 그 소리 역시 사라지죠. 가야금이 띵~ 하고 울리고 사라지는, 그러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남아있는 그 한없이 미세한 진동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소리는 한없는 우주공간으로 가는 것이냐고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씨에게 물어봤더니 모르겠다며 상상력 좀 그만 펴라고 합니다."

듣다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아니, 이게 웃을 일이 아니라고 다시 긴장했다. 소리와 우주의 관계? 조형물에서 소리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조형물은 고정돼 있고 소리는 한없이 퍼져 나가는 자유다. 여기까지 작가가 끌어올렸다면 이제 진짜 진국이자 진수가 나올 터.

"덧없는 것이 소리죠. 탕! 하고 올라오는 소리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낯설고 새로운 소리이며 2, 3초 동안 새로운 경험을 하고 사라지죠. 그러나 탕! 은 한없이 영원한 것이고 덧없는 것이 영원한 것을 포함하는 것이죠. 탕=한없이 영원한 것. 어째서 인간 앞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하모니카밖에 불 줄 모른다는 작가는 음악연주란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이 아니고서는 악기에서 끌어낼 수 없으며 모든 음악은 살아 있는 동안 아름다움으로 나온다고 믿는다. 즉, 아름다움이란 살아 있는 목숨, 생명이며 음악이란 시간이고 시간은 아름다움의 바탕이다.

"미래의 시간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시간의 바탕이 없으면 (인간이) 존재하지 못하죠. 과거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 밀가루보다 더 섬세한 알갱이로 내 몸에 끊임없이 들어오며 이것은 다 새로운 것이며 놀라운 사태죠."

그래서 <현의 노래>는 그의 말대로 '음악은 미래를 위해 선율을 만들어 내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는가. 그는 시간의 알갱이가 우리의 몸속으로 계속 흘러 들어오고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낯설고 새로운 미지의 것이며 (이 시간의 알갱이들이)창조하고 사회를 바꾸고 진보와 개혁을 하게 하는 '인간의 축복' 이라고 단언했다.

"결론은 인간은 아름답다, 아무리 더러운 세상에서도 인간은 끝내 아름답다는 것이죠. 시간의 알갱이를 재공급 받는 설렘. 문학은 인간의 미래이며 모든 것이죠."

가야금이 퉁기는 가장 높은 소리는 사라졌다. <칼의 노래>를 쓸 때 휘모리에서 중모리, 중중모리 장단으로 글을 썼다는 나머지 강연은 별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절정의 메아리가 우주 속으로 아스라이 영원한 파장으로 남는 연주를 듣고 나면 휘모리의 빠른 장단도 아다지오로 들릴 수밖에.

a 예정시간을 20분이나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끝날 때까지 진지하게 강연을 듣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고 작가 김훈은 "감동 받았다"고 말했다. 줄을 서서 저자 사인을 기다리는 모습.

예정시간을 20분이나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끝날 때까지 진지하게 강연을 듣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고 작가 김훈은 "감동 받았다"고 말했다. 줄을 서서 저자 사인을 기다리는 모습.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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