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선생님은 4시에 만나기로 되어있고, 과학 선생님은 6시40분이니 두시간 반 동안 어떻게 기다리지?"
"종이 울렸는데 저 학부형은 왜 아직 자리를 뜨지 않는 거야? 이번 면담 후에 바로 다음 면담이 있어서 시간이 늦어지면 낭팬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여유있게 순서 안배를 할 걸 그랬나 봐."
"일본어 선생님은 6시부터 저녁을 드시기로 되어있으니 우리도 그 시간동안 식사를 하고 오는 게 좋겠어요. 어차피 밤 8시 반까지는 학교에 있어야 할 테니까 우선 밥부터 먹고 오자고요."
한국과는 반대로 1학기 겨울방학을 마치고 7월 중순경부터 2학기가 시작된 호주 퀸즐랜드 주의 한 고등학교의 어느 이틀간의 저녁풍경이다.
평소라면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한산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이건만, 이날만은 3시30분경부터 학부형들이 몰고온 차들로 교정이 다시금 붐비기 시작해서 밤늦은 시간까지 좀체 열기가 식지 않았다.
이날은 자녀들의 학교생활과 학업성취도를 교사들로부터 전해듣고 자녀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전교 차원의 면담일로, 지난 한학기 동안 궁금했던 모든 것을 털어놓기 위해 학부형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호주 퀸즐랜드 주 학교는 대부분 학기말과 학년말 두차례에 걸쳐 전 학부형과 전 교직원이 자리를 함께 하는 면담(Parent Teacher Interviews)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각 학과 담당교사는 물론이고 담임과 학부형이 정식으로 상견례를 하는 기회도 학기말에 주어지는 첫번째 면담시간을 통해 이뤄진다.
면담은 학기말과 학년말에 담임교사 및 학과 담당 교사의 요청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학부형측에서 신청할 수도 있다. 면담을 희망하는 학부형들은 1학기 성적표와 함께 각 가정으로 보내오는 인터뷰 신청 용지에 원하는 시간을 적어내면 다른 학부형들과 겹치지 않는 한에서 학교측에서 안배를 하여 최종 면담 시간을 통보하는 것으로 주선된다.
2일간 치러지는 면담을 위해 하루 수업을 마친 교사들은 오후 4시부터 저녁 8시까지, 저녁식사 시간 30분을 빼고는 꼬박 4시간을 학부형들에게 제시할 시험답안이나 성적산출 근거자료, 학생들의 품행이나 행동발달 상황 등을 체크한 기록표를 꼼꼼히 준비하고 상담에 임하는 고된 시간을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각 가정에 할당된 면담시간은 최대한 10분이기 때문에 부모들 또한 묻고자 하는 요지를 잘 정리해서 교사들을 만나야 한다. 중언부언했다가는 자칫 알고 싶은 것을 놓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다시 개인적으로 인터뷰를 신청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잠재력이 있는 학생인데, 수업 중에 꾀를 부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집중해서 최선을 다한다면 다음번 시험에는 꼭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겁니다. 집에서도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교우관계는 무난합니다. 또래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고, 누구보다 명랑한 성격이라 급우들의 인기를 끌지요…."
이 학교 10학년(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중인 아들의 과학 교사를 만나기 위해 면담 신청을 했다는 마이클(43)씨는 앞 사람이 늦게 나오는 바람에 3·4분 늦게 시작된 면담이 기어이 10분을 채우지 못하고 말허리를 잘렸다며 아쉬워했다. 자기 뒤에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학부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야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들의 과학 성적이 무난하고 학교생활에도 별 무리가 없다고 하니 다행이라며 만족해했다.
전 교직원과 전 학부형들을 대상으로 하는 면담장소는 체육관이나 강당을 이용한다. 마치 군부대의 면회장소처럼 긴 평상을 줄맞춰 늘여놓은 후 각 과목 담당 교사들의 명패를 꽂아 놓는다. 60여명이 넘는 교사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며 10분 간격으로 드나드는 학부형들을 맞이한다.
강당의 단상 한켠에는 교무주임이나 학생주임이 매 10분마다 면담 시작과 종료를 알리는 종을 친다. 종이 울릴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학부형들과 뒤이어 교사들을 만나러 들어오는 학부형들로 순간 혼잡이 빚어지기도 한다. 강당을 무시로 오가며 학부형들과 인사를 나누고, 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도 이틀을 함께 보낸다.
웅성대는 강당에서 잡음을 무시해가며 두 귀를 모아 자녀들의 시험성적과 결과에 대해 설명하는 교사들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 새라 머리가 서로 닿을 듯 집중하는 진지한 광경이 연출되는 것이다.
학부형들은 만나고자 하는 교사들의 시간순서를 거듭 확인하며 강당 로비에 비치된 커피와 차, 다과 등을 나누며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선생님들의 스케줄과 같이하여 저녁식사를 한 후 다음 시간을 대비하기도 한다.
호주의 각 학교는 한 해 두 차례 치러지는 일제 면담기간을 가장 중요한 학내 행사로 꼽는다. 교사와 학부형, 학생간에 충분한 의사전달과 협력, 교류의 기회를 마련한 후, 학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정돈된 상태에서 다시금 한 학기 수업을 진행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1년에 두번 주어지는 공식적인 일제 면담기간이 지나게 되면 특별한 사안이 없는 한 학부형들이 교사를 만날 기회는 좀체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회를 잘 활용하지 않으면 1년 내내 심지어 아이의 담임선생 얼굴도 모른 채 지나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면담기간 외에는 체육대회나 학예회 등 학내 행사가 열릴 때에도 담임선생을 만나 인사를 하거나 자녀가 상을 받았다 해도 보통은 선생님을 따로 만나지 않는다.
이처럼 교사와 학부형간의 공개된 장소, 공개된 시간 속의 만남이 주어지는 호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간혹 불거져나오는 촌지 문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교장과 교감, 주임교사, 평교사 할 것 없이 전 교직원이 한 장소에 한데 모여 학부형들을 만나고, 엄격하게 짜여진 시간표대로 앞 뒤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른바 '봉투'를 건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매 학기 초만 되면 학교를 찾아가서 선생님을 만나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하고, 교사들 또한 학부형들을 만나고 싶어도 공연한 오해를 살까 염려하는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도 호주와 유사한 투명한 면담 프로그램을 도입해 보는 것은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새교육> 9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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