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서 이랬다면 보복당했을 거예요"

[현장]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한반도에서 하나되다

등록 2005.08.30 19:21수정 2006.01.2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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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한국 학생등이 제부도 겟벌에서 함께 어울려 미니 축구게임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한국 학생등이 제부도 겟벌에서 함께 어울려 미니 축구게임을 하고 있다. ⓒ 이강근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했다간 보복당할 것입니다!"

한국을 방문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학생대표단 일행인 '이도'와 '라샤'가 제부도 갯벌에서 서로 얼굴에 진흙을 마구 칠하며 던진 말이다.

지난 8월 15일부터 시작된 역사적인 이스라엘 가자 정착촌 철수가 완료됐다. 당초 세계는 가자 철수로 중동지역이 평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자를 내어주는 대신 요르단 서안의 예루살렘 북쪽 정착촌 확대계획인 E1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는 세를 몰아붙여 예루살렘을 비롯한 요르단 서안의 추가 철수를 목표로 대 이스라엘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한 상황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에 대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점쳐보는 이는 그 누구도 없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에서는 이스라엘 대학생 대표와 팔레스타인 학생 대표들이 의미 있는 만남을 갖고 있다. 8월 26일부터 9월 5일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생 대표 20여명이 경기도(도지사 손학규) 주최 세계평화축전 행사 일환으로 평화친구만들기 행사를 열고 있는 것.

a <font color=a77a2>[이랬던 이들이]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방한 첫날 수원에 소재한 라비돌리조트에서 첫 모임을 갖고 있다. 다들 아직 긴장된 표정이다.

[이랬던 이들이]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방한 첫날 수원에 소재한 라비돌리조트에서 첫 모임을 갖고 있다. 다들 아직 긴장된 표정이다. ⓒ 이강근

가깝고도 먼 그들, 어색한 만남이 시작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과연 함께 어우러질 수 있을까? 제부도에 모인 대학생들의 면면을 보자.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소재 베들레헴 대학이나 라말라 소재 비르젯 대학의 학생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학교를 오가며 거의 매일 이스라엘군의 검문을 여러 차례 통과해야 한다.

또 이스라엘 학생들은 의무병제로 군대에 갔다 와야만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제부도에 모인 이스라엘 학생들은 실제 현장에서 팔레스타인 학생들을 통제했던 예비역인 셈이다.


이들이 한국으로 온 과정도 현지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같은 땅에 살면서도 사뭇 다른 경로를 거친 것. 이스라엘 학생들은 텔아비브 공항으로 이동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학생들은 보안을 이유로 이스라엘 공항을 이용할 수 없어 육로로 요르단으로 이동한 뒤 암만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것도 국경통과에 얼마가 걸릴지 몰라 하루 전에 암만으로 출발해야 했다.

몇 시간 간격으로 한국에 먼저 도착한 이스라엘 학생들은 경기 수원의 한 호텔에서 팔레스타인 학생들을 맞았다. 같은 수의 한국 학생들이 주관이 되어 환영 모임을 이끌었다. 그러나 첫 만남은 어색함 그 자체였다.


서로 먼 길을 왔음에도 잘 왔느냐, 어려움은 없었느냐는 빈말 한번 건넬 수 없었다. 이스라엘 학생들은 이스라엘 공항에서, 팔레스타인 학생들은 하루 반나절 육로를 이용해 요르단에서 온 것을 서로 알면서도 말이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가해자, 팔레스타인은 희생자라는 게 무언의 분위기였다.

"제 애인은 이스라엘군의 총에 맞아 죽었고, 남동생은 20년 형을 선고받고 이스라엘 감옥에 복역 중입니다."

팔레스타인 학생들은 어느새 자신들의 하소연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제닌 출신 팔레스타인 학생 '살람'(29)은 사랑하는 애인이 이스라엘 군의 총에 맞고 숨졌다고 한다. 그의 남동생은 20년 형을 선고받고 이스라엘 감옥에서 복역 중이다. 베들레헴 출신 남학생 '아미르 바움'(23)은 아버지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정신이상자가 됐다고 전했다.

a <font color=a77a2>[조금씩 가까워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어색함을 풀기 위해 레크레이션을 하고 있다.

[조금씩 가까워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어색함을 풀기 위해 레크레이션을 하고 있다. ⓒ 이강근

팔레스타인 국기를 보며 환호성을 지르다

"앗, 팔레스타인 국기다!"

3일째인 28일 점심, 경기도지사가 주최한 만찬장에 들어가려던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자신들의 국기를 보고 뛰며 좋아했다. 입구에 길게 늘어뜨린 만국기에서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국기를 발견한 것이다. 걸쳐놓은 국기가 누렇게 색이 변한 것을 봐서 일부러 걸어놓은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학생도 이스라엘 국기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머쓱하게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이토록 그들의 국기를 반긴 것은 국민은 있으되 나라는 없는 서러움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한국에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 탑승 수속을 밟으려고 앞줄에 섰지만 이들은 뒤로 밀려났다. 팔레스타인 국가 코드가 없어 탑승진행이 될 수 없었던 것. 탑승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이스라엘 코드로 대신 입력한 뒤에야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그러나 시련은 한국 공항 출입국 심사대에서도 계속됐다. 텔아비브 한국 대사관에서 정식으로 비자를 발급받고 왔지만 역시 국가 코드가 없어 처리가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한 식당에서 발견한 팔레스타인 국기가 그들에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a <font color=a77a2>[어느새 친구로] "이스라엘에서 이롔다간 보복 당할 것입니다." 서로 진흙을 칠하는 이스라엘 학생 '이도'와 '라샤' 팔레스타인 학생.

[어느새 친구로] "이스라엘에서 이롔다간 보복 당할 것입니다." 서로 진흙을 칠하는 이스라엘 학생 '이도'와 '라샤' 팔레스타인 학생. ⓒ 이강근

나라간 증오를 이긴 젊음의 힘

둘째 날이었던 28일, 팔레스타인 한 학생이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하소연을 했다. 단 1초라도 이스라엘 학생들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 애인을 잃고, 남동생을 이스라엘 감옥에 보내야 했던 살람이었다. 이스라엘 학생도 싫고 속도 없이 이스라엘 학생들과 히히덕거리는 팔레스타인 학생들도 싫다는 것이었다.

"쟤네들은 진정한 팔레스타인학생이 아녜요!" 결국 제일 빠른 비행기를 알아보겠다는 대답으로 진정시켰지만, 비행기편을 알아보기도 전에 살람은 젊음이라는 공감대 속으로 하나가 되어 갔다. 용인 에버랜드에서, 경주 신라시대 유적지에서, 제부도 앞 갯벌에서 진행된 놀이와 프로그램은 이들을 하나의 젊은이들로 묶어놓았다.

서로에 대한 거부감도, 미움도 모두 극복했다. 팔레스타인 여학생이 이스라엘 남학생 머리에 진흙을 덮어 칠하자, 이스라엘 남학생이 팔레스타인 여학생의 얼굴에 진흙을 씌어주며 말했다. "내가 만일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여학생에게 이렇게 했다면 아마 보복당할 것입니다!"

한국 땅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한 외침이다. 아니 믿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팔레스타인 여학생은 어느새 이스라엘 남학생의 얼굴에 진흙을 덧씌우며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a 기왓장에 히브리어, 아랍어, 한국어 등 3개국어로 평화기원 메세지를 쓴 학생들 들여다보고 있다. 왼쪽부터 팔레스타인 쌀람, 한국학생 김현정, 이스라엘학생 레나.

기왓장에 히브리어, 아랍어, 한국어 등 3개국어로 평화기원 메세지를 쓴 학생들 들여다보고 있다. 왼쪽부터 팔레스타인 쌀람, 한국학생 김현정, 이스라엘학생 레나. ⓒ 이강근

"내년엔 예루살렘에 남북학생을 초대하겠다"

이스라엘 대표단은 텔아비브대학 총학생회장을 비롯 텔아비브와 히브리대학의 학생임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군장교 출신도 있고, 인텔 펜티엄4 개발팀의 인재도 있다. 국회의원 비서도 있고 영재학교 출신도 있다.

모두가 나름대로 이스라엘 사회의 리더그룹 학생들이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한 마음은 열려 있다. 한국 방문 초청을 받았을 때 제3의 나라 한국 땅에서 팔레스타인 친구만들기에 동의한 학생들이다.

"우리만 살려고 하면, 우리도 불행해집니다. 팔레스타인도 살아야, 우리도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히브리대 정치학과 학생 아밋 이비구르(27)의 말이다. 가해자라는 이미지를 무릅쓰고, 팔레스타인을 이해하고 공존하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 학생들은 어느덧 팔레스타인 학생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있었다.

텔아비브대학 총학생회장 보아즈 트로포브스키(26)는 "내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동으로 남한과 북한 학생을 예루살렘으로 초청할 것"이라며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학생들이 함께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생들은 이제 '친구만들기' 일정의 반을 보내고 있다.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어가는 프로그램을 마치고, 이후부터는 친구된 이들이 함께 평화운동을 전개한다.

9월 1일에는 판문점과 임진각 평화공원을 방문하고, 도라산에서 평화토론을 벌인다. 이 자리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생대표가 공동으로 남북한 학생을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초청한다는 공식 편지를 낭독할 예정이다.

9월 5일에는 이스라엘 대사의 초청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학생대표들이 주 대한민국 이스라엘 대사관 만찬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국회를 방문해 여러 국회의원을 만나 간담회를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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