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에서 만끽하는 한낮의 여유로움

한적 고담한 삼청동 나들이

등록 2005.08.31 08:29수정 2005.08.3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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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5년 8월 30일

2005년 8월 30일 ⓒ 민은실


"나는 낯 설은 의자에 앉아서
나는 낯 설은 거리를 보면서
나는 낯 설은 소식을 듣고서
나는 낯 설은 생각을 하면서…"

루시드폴의 노래 <삼청동>의 가사다. 가방을 끌어안고 삼청동의 간이 의자에 앉아 거리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모습이 언뜻 그려진다.


조용하면서 단아한 정취의 삼청동을 좋아한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인사동처럼 복잡하지도 않고, 구석구석 볼거리가 많은 그곳에는 여유로움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또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묘연한 기분도 매력적이다.

삼청동으로 가는 경복궁 길도 한적하다. 덕수궁 돌담이 이유 없이 도회적인 느낌이 든다면 경복궁은 고풍스러움 그 자체다. 높은 돌담 위에 얹어진 기와와 우거진 나무 그늘 사이로 걷는 기분이란…. 마치 조선시대 마님이 마실 나온 것 같은 즐거움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담벼락 너머로 궁중음악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a 2005년 8월 30일.

2005년 8월 30일. ⓒ 민은실

삼청동 입구에 들어서자 방앗간이 보인다. '고추방아, 떡방아'라 쓰인 푯말의 방앗간은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겉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하늘을 향해 있는 연기 통 위로 참새들이 몰려 올 것 같은 모습이다.

모던하고 심플한 디자인과 테크 요소를 가미한 인테리어가 아무리 대세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런 인테리어가 좋다. 구식이라도 친근하고 정겨운 옛날 그대로의 멋을 살린 방앗간 같은 곳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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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30일. ⓒ 민은실

방앗간 건너편에는 골동품 장이 열리고 있다. 장이라고 해봤자 3평 남짓한 길바닥에다 진열해 놓고 파는 정도다. 한번 훑어보고 지나가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자기와 놋그릇 등 골동품만 있는 줄 알았더니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부르던 시절에 볼 수 있었던 산수책과 사회과부도 책도 있다.


종종 인사동에서도 볼 수 있는 벼룩시장이 이곳에서도 열리는 것. 마치 과거의 추억을 팔고 사는 것 같은 기분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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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30일. ⓒ 민은실

찬찬히 걷고 또 걸었다가 좁은 계단과 마주쳤다. 문득 법정스님의 말이 떠오른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거라고, 삶에서 뻐근한 저항 같은 것을 느껴야 사는 것 같지 않느냐고. 이 좁은 계단의 오르막길이 아름답다는 망상에까지 이르는 데는 얼마 오래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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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30일. ⓒ 민은실

아! 하늘 아래 뫼이로다. 낮은 돌담과 굽은 가지의 소나무와 집이 한데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을 보라. 하늘이 배경이고 기와지붕과 소나무는 손수 만든 소품 같은 느낌. 이런 집에서 유유자적하게 시집이나 읽으며 살면 좋을 텐데…. 한 폭의 동양화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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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30일. ⓒ 민은실

한 시간 남짓 삼청동을 걷다 카페를 발견. 레스토랑 겸 바인 이곳의 창은 맑은 블루다. 저 안에서 비오는 걸 본다면 참 맑아지는 기분이겠다 싶어 비 오는 날 다시 오자 결심했다. 아니다. 내친김에 땡볕 아래서 계속 걷는 것도 힘드니 잠시 쉬자.

조용한 카페 안에서 바라보는 삼청동은 한적하다. 오랜만에 혼자서 누리는 호사, 휴식시간. 커피를 마시며 일기를 쓰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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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30일. ⓒ 민은실

카페 위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삼청공원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크지 않은 규모지만 산을 깎아 만든 공원이라 맑은 공기가 충만하다. 코를 찌르는 흙냄새도 좋다. 나무고 꽃이고 간에 마른 흙의 비린내가 좋다. 강원도에 있는 할머니네 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잡초가 무성한 목마른 계곡이 조금은 쓸쓸해 보이기도 했지만 여기도 비가 오면 제 모양을 찾겠다 싶다.

이제 삼청동 한 바퀴 다 돌았으니 집으로 갈 시간. 마을버스를 타러 내려가는 길이다. 꼭 어디를 떠나야만 맛인가. 도심 속에서도 얼마든지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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