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이 주는 축복에 '빠져봅시다'

[산수가 천하의 으뜸, 양양여행기 2]한계령을 둘러싼 이야기들

등록 2005.09.02 23:58수정 2008.03.17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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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 길은 언제부터 사람이 다니기 시작했을까. 구석기,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던 양양인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한계령 길이 나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고려사>에 기록된 것이 최초인 듯싶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고종 44년 당시 몽고군은 철원, 춘주(현 춘천), 인제를 거쳐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진격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 춘주성의 항복소식을 듣고 인제 지역 백성들이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피난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한 한계령이 조선 초기에는 험하다는 이유로 폐쇄되었다.

 

1400년대에서 1500년대 사이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편에서는 한계령을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적고 있다. 즉, 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된 1481년 이전에 한계령 길을 폐쇄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사유는 증보문헌비고에 나와 있다. 증보문헌비고 중 미시령을 설명한 부분을 보면 ‘조선 성종조에 양양부의 소동라령(所冬羅嶺, 현 한계령)이 험액(險阨)이라고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폐쇄했다고 해서 전혀 사람이 다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750년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택리지>에서 이중환은 백두대간 강원도 지역의 령 여섯 개 중 하나로 오색령(현 한계령)을 손꼽았으니, 험하다 해서 다니지 않았던 것은 조선 왕실과 양반 사대부일 뿐, 민초들은 1971년 현재의 한계령 포장도로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한계령 오솔길을 통해 백두대간을 넘나들었다.

 

현재의 한계령 도로는 1968년 김재규가 사단장으로 있던 1102 야전 공병단에서 착공하여 1971년 완공하였다. 한계령 도로의 완공을 기념하여 한계령 108계단 위에 있는 설악루라는 정자 옆에 공덕비를 만들었으며 “설악루”라는 현판은 김재규 당시 사단장이 직접 썼다고 하며, 현재까지 전해온다.

 

이러한 한계령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아마 1984년 시인과 촌장이 처음 불렀고, 양희은씨가 1985년에 다시 부른 노래 “한계령”(작사: 정덕수) 때문일 것이다. 계간 <시인세계>에서 2004년 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글 짓는 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 중 5위에 뽑힐 정도로 가사가 시적이며 서정적인 선율을 지니고 있는 노래 “한계령”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한계령”을 부른 양희은씨는 이 노래를 부른 지 10년이 지나서야 한계령에 처음 와 봤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양희은씨에게 ‘사기’라고 했단다. 그럴 때마다 양희은씨는 ‘그럼 연극배우들은 암환자 연기할 때 암 걸려보고 하냐’며 대꾸하곤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계령의 옛 이름을 찾아서

 

"소동라所東羅, 그녀의 이름이었다. 서른 하나, 그녀의 나이였다. 현수(絃首, 코머리), 그것은 그녀의 신분이었다. 양양 고을의 관기, 그리고 그 우두머리. '천첩의 기명을 소동라령(현 한계령)에서 딴 것은 실로 외람된 바가 적지 않사온데, 여짜오면 내륙의 길손은 원통역으로부터 반드시 소동라령을 넘어야만 비로소 설악에 이를 수가 있사옵고, 또 설악을 거쳐서 본읍에 당도하셔도 마땅히 천첩의 수발을 넘어야만 마침내 양양을 보았다고 하리라 하여 기명으로 정했던 터입니다. 하오나 나리께서는 바야흐로 천첩의 시험을 넘으신 듯하옵기에 감히 아뢰오니다.'"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쓴 <매월당 김시습>의 한 장면이다. 물론 양양 고을의 기생으로 나오는 소동라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김시습과 수작하는 기생의 이름으로 한계령의 옛 지명인 “소동라”를 붙이고, ‘소동라령을 넘어야만 양양과 설악에 다다를 수 있고, 소동라의 수발을 넘어야만 마침내 양양을 보았다’고 한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김시습이 살았던 15세기에는 한계령을 “소동라령(所冬羅嶺)”이라 하였다.

 

문헌상 가장 최초로 등장하는 한계령에 관한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의 “소등라령(所等羅嶺)”이다. 소등라령을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바드라재’로 번역하였다. 속초여고 주상훈 교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바드라'였다. 이 바드라를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이두식으로 소등라(所等羅)라고 표기하였다가, 그 후 조선시대 읍지류에서 발음상 편한 소동라(所冬羅)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후기 문헌인 택리지, 대동여지도, 증보문헌비고 등에서는 전부 한계령을 ‘오색령’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와 같이 한계령으로 명명된 것은 1968년 공병부대가 한계령 도로공사를 인제쪽에서부터 시작하다 보니 인제군 한계리의 이름을 따 한계령이라 하였다.

 

한계령(寒溪嶺)은 한계령(限界嶺)인가?

 

그렇게 최근에 명명된 한계령이라는 이름은 문인들에게 새로운 작품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많은 문인들이 한계령을 삶의 한계 또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의 한계라는 의미로 읽으며 그 한계를 깨닫거나 혹은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담은 시, 산문, 소설을 남기고 있다. 즉, 차디찬 계곡이라는 뜻의 한계령(寒溪嶺)을 넘지 못하는 일정한 범위라는 뜻의 한계령(限界嶺)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 중에 '한계령을 위한 연가'(문정희 시)는 오히려 한계령의 한계에 묶이길 원하는 유일한 작품일 것이며, 한계령에 관한 시 중 가장 알려진 시이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란이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삶이 몹시 힘들거나 지칠 때면 문인들처럼 한계령에 올라 나의 한계를 곱씹으며 다시 극복할 기운을 회복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문정희 시인의 말처럼 겨울 한계령에 올라 한계령이 주는 축복을 누려보자.

 

한국건축가협회 대상 수상작 '한계령휴게소'

 

한계령에 가면 누구나 한 번쯤 들르는 곳이 한계령휴게소이다. 거대한 자연을 억누르지 않고 자연 속에 부드럽게 안겨 있는 건축물, 혹여 한계령과 설악의 경치를 보고자 하는 이들의 눈길을 현혹시킬까 두려워 온통 검정으로만 칠해져 있는 외관, 남설악에 대한 탁월한 전망을 제시하는 휴게소 테라스 등 한계령휴게소는 겸손의 미학을 지니고 있는 건축물이다. 그럼으로써 가장 훌륭하게 자연과 어우러져 있으며, 미시령휴게소나 대관령휴게소와 비교해 생각해보면 더욱 한계령휴게소가 자연친화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한계령휴게소는 미국의 <타임> 지에서 ‘한국의 가장 경탄할 만한 훌륭한 건축가’라고 평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축물이다. 이 땅에 현대건축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건축도 예술임을 증명한 김수근 선생은 건축을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 여겼다. 한계령휴게소는 창암장과 더불어 김수근 선생의 건축작품 중 자연과 가장 어우러진 건축물로 꼽힌다. <김수근 건축론>을 쓴 정인하 교수는 한계령휴게소의 설계와 건물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계령휴게소는 한계령의 정취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존의 지형을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건물이 자연스럽게 대지에 삽입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한계령에서 보이는 설악산의 장엄한 환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건물 내에서 어디서나 바깥을 감상할 수 있도록 건물을 충분히 개방하고, 테라스를 길게 뽑았다. 또한 폭설과 강풍, 추위에 견딜수 있도록 외부는 목조로 처리하되, 실제 구조는 철골조로 시공되었다.'

 

이러한 작품성이 인정되어 한계령휴게소는 1982년 한국건축가협회 대상을 수상하였다.

 

양양과 남설악으로의 전망을 훌륭하게 제공하는 한계령휴게소 덕분에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차장 옆 울타리로 달려가 한계령의 전망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한계령 가는 길과 여행코스

한계령 가는 길

대중교통 : 1) 서울상봉-양양 경유 속초행, 오색 하차/고속 3:30, 일반 4:20 소요

동서울-양양 경유 속초행, 오색 하차/고속 3:30, 일반 4:20 소요

2) 양양 - 오색 시내버스 이용/ 30분 간격 운행/ 30분 소요

속초 - 오색행 시외버스/ 15회 운행/ 40분 소요

도로안내 : 1) 서울 망우리고개 -> 6번 국도 -> 양평 -> 용두리에 이르러 44번

국도 -> 70.7Km -> 한계리 민예단지 휴게소앞 삼거리 -> 한계령

방면 44번 국도 -> 8.6Km -> 제1,2옥녀교 -> 제1,2장수교 ->

장수대 -> 한계령

2) 경부 또는 중부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홍천

방향) -> 홍천IC -> 44번 국도 -> 한계리 민예단지 휴게소앞 삼거

리 -> 한계령방면 44번 국도 -> 8.6Km -> 제1,2옥녀교 -> 제1,2

장수교 -> 장수대 -> 한계령 / 이철

2005.09.02 23:58ⓒ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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