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리나 대재앙' 흑인도 책임있다?

연방정부-주정부, 서로 삿대질

등록 2005.09.05 01:51수정 2005.09.05 19:20
0
원고료로 응원
a 폐암을 앓았지만 허리케인 때문에 산소가 떨어져 숨진 남편 시체 옆에서 흐느끼고 있는 뉴올리언스의 한 여인.

폐암을 앓았지만 허리케인 때문에 산소가 떨어져 숨진 남편 시체 옆에서 흐느끼고 있는 뉴올리언스의 한 여인. ⓒ AP/연합뉴스

마치 TV카메라맨들과 사진기자들이 흑인들만 골라 찍겠다고 담합이라도 한 것일까. 카트리나로 쑥밭이 된 뉴올리언스에서 전송되는 화면은 그런 오해가 들 정도로 흑인 일색이었다.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약 28%로 추산되는 뉴올리언스의 빈곤층 중 흑인의 비중은 무려 84%에 이른다. 이들 중 35%는 미국 생활의 필수품이나 다름 없는 자동차가 아예 없어 도시를 탈출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백인들이 이미 오래 전에 폰차트레인 호수 북쪽으로 이주하거나 도시의 고지대에 정착한 반면, 비싼 집세를 감당할 수 없는 흑인들은 홍수에 취약한 뉴올리언스의 저지대에 대규모의 빈민촌을 형성했고 무너진 제방에서 쏟아진 물은 이들의 삶의 터전을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연방정부의 구호가 지연되는 이유가 난민들 태반이 흑인인 탓 아니냐는 분통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지만 부시 정부로서는 이런 비난이 억울할 수도 있다. 부시 정부는 카트리나가 오기 전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대피경고를 발령했고 제방이 터지면서 피해규모가 커지자 부시 대통령이 휴가를 이틀 앞당기며 뉴올리언스 일대를 전용기로 직접 둘러보기도 했다.

또 슈퍼돔에 갇힌 2만5천여명의 이재민을 후송하기 위해 연방정부의 버스 수 백여 대를 급파했지만 구조헬리콥터에 총기가 발사되고 방화와 약탈이 벌어지는 대혼란 속에서 여러 차례 구조작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부시 정부가 이런 나름대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늑장대응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은 이번 재난이 누구도 예상 못 할 만큼 엄청난 속도로 뉴올리언스를 순식간에 집어삼킨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CNN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언론조차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다음날 까지도 이번 재해의 심각성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사망자 수가 심지어 1만 여명을 넘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가질 정도지만 사태 초기에는 기껏 수 백여 명에 그칠 것이라는 보도가 태반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상황 판단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흑인들을 차별해서 재난대응이 늦어졌다기 보다는 하필이면 재해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주민들이 흑인이었다는 사실이 결과적으로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한 번 둑이 뚫린 인종차별 논란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사태 초기 시내 호텔에 투숙 중인 백인들이 호텔 4륜구동 차량의 호위 속에 도시를 탈출하는 모습을 지켜본 흑인들은 정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좌절감에 분노를 터뜨리고 있으며 심지어 백인들이 제방을 고의로 폭파시켰다는 유언비어까지 확산되고 있다.

지난 금요일 구호방송에 출연한 흑인 랩 가수 케인 웨스트는 "똑같이 먹을 것을 찾아헤매는데도 언론이 흑인은 '약탈'을 하고 있고 백인은 식량을 '찾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며 생방송 도중에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는 이어 조지 부시는 흑인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고 주 방위군은 흑인들을 정조준해 사격하고 있다며 연방정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한편 국토안보부 마이클 체르토프 장관이 연방정부의 늑장대응을 탓하는 여론에 주 정부의 미숙한 대처를 질타하면서 반격에 나서 논쟁은 이제 인종갈등에서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의 책임소재 공방으로 번지는 형국이다.

체르토프 장관은 "미국 헌법에 따르면 재난대비의 1차적 책임과 권한이 주지사에게 있다"고 발언해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모습을 이미 보인 바 있다. 부시 대통령 역시 재난의 규모가 엄청나 주정부나 뉴올리언스 시 당국자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지적해 책임논란에 기름을 끼얹었다.

하지만 거듭된 경고와 대피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안이하게 집에서 머물다 피해를 당한 뉴올리언스 흑인들의 책임 역시 무시할 수 없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하버드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젱크스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흑인들이 피난에 아예 나서지도 않았고 나설 여력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거듭된 경고를 믿지 않았다"며 임박한 재난의 위협에 태평스런 모습을 보인 흑인들의 모습을 꼬집기도 했다.

무너진 제방은 언젠가 복구가 되겠지만 인종과 계층간에 깊이 패인 골은 언제 메워질 수 있을 지 기약이 없다.

카트리나는 이제 단순히 하나의 재앙의 수준을 넘어 미국 사회의 향방을 좌우할 수도 있는 매우 '정치적 성격을 지닌 허리케인'이었음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4. 4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