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중국인', 소매점 여주인

아파트 소매점 여주인에게 여러 번 신세진 사연

등록 2005.09.05 03:27수정 2005.09.0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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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는 여섯 개가 넘는 단지가 빙 둘러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중간에 작은 매점이 하나 있는데 간단하게 음료수와 계란, 과자 등을 파는 곳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항상 모여서 '마작'이라는 중국 놀이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아파트 2층에 자리잡은 우리 집에서 소매점은 정면으로 내다보인다. 세 살 난 우리 큰딸 정도의 아이를 둔 주부들이 소매점에 모여 이야기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면 나도 얼른 내려가 그 이야기 속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항상 망설이다가 그만둔다. 아직은 낯이 설고 말도 그다지 능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소매점 여자와는 계란이나 음료수 같은 간단한 걸 살 때마다 자주 왔다 갔다 해서 눈인사로 이미 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고 있는 나를 딸 소연이 큰소리로 부르기에 가보니 안방에서 놀다 나오면서 문의 잠금단추를 누른 채 닫아 그만 방문이 잠겨버린 것이다. 집주인에게 방 열쇠를 받아놓지 않아서 순간 당황했다. 시간이 겨우 오후 2시 정도였기에 열쇠집을 알고 있는 남편을 기다리자니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전화기가 안방에 있어서 전화도 할 수가 없고 방에 에어컨과 컴퓨터가 켜져 있어서 긴 시간 지체하자니 아줌마 쫀쫀한 마음에 전기요금이 왜 그리도 걱정이 되던지….

입고 있던 바지 주머니에 약간의 돈이 좀 있어서 일단 아이들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할지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눈앞에 보이는 소매점으로 갔다. 가자마자 주인 여자에게 전화 좀 쓰자고 말하고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에게 사정이야기를 하니 집 근처 열쇠집을 알려줘서 대충 알아듣고 찾아가 보았다. 더운 날씨에 둘째 안고 큰딸 손잡아 끌며 찾아 나섰는데 아무리 찾아도 내 눈엔 보이지 않았다. 한 삼십분을 헤매다 보니 동네를 한바퀴 돌고 다시 우리 아파트 앞이었다. 기가 막혔다.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보았던지 소매점 여자가 무슨 일이냐며 먼저 물어왔다. 나는 공부한 중국말 띄엄띄엄 써가며 손짓발짓까지 해서 설명하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자기 아는 열쇠집에 전화를 해 주었고 5분 정도 후에 문을 열 수 있었다. 나는 유비무환이란 한자성어를 떠올리며 열쇠공에게 미리 명함을 받는 센스까지 발휘했다. 잠시 소매점에 내려가 고맙다는 인사를 넙죽하고 올라왔다.

그 후로 소매점에 갈 때마다 우리는 점점 대화가 길어졌다. 그녀의 세 살 난 딸도 이제는 날 보고 인사를 한다. 우리 딸들을 보고 부러울 것이 없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녀에게 나는 "셰셰" 하며 고맙다는 말로 끝을 맺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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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은화

얼마 전에는 딸 소연이가 갑자기 변한 날씨 때문에 목감기와 기침감기가 걸려서 한참동안 아팠다. 약국에서 사온 약을 먹이는데도 꽤 오래 가기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래도 나아지는 기미가 있어서 계속 약을 먹여보기로 했다.

입맛이 없는지 소연이는 다른 반찬은 잘 먹지도 않고 좋아하는 계란만 먹었다. 그날도 계란을 해주려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다 떨어지고 없었다. 마침 둘째도 자고 있어서 그 사이 소연이를 데리고 소매점으로 향했다. 소매점 여자는 소연을 보자마자 살이 많이 빠져 보인다고 했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딸이 요즘 감기로 고생한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계란값을 치르고 돌아서려는 나에게 그녀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얼떨결에 따라가니 아파트 중간에 큰 나무가 한그루 심어져 있는데 그 주위에 잔디처럼 자란 풀 같은 것을 뽑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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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은화

나는 그냥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한참을 뜯더니 한 웅쿰 쥐어 비닐에 넣어주면서 감기에 좋다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대충 알아들은 나는 한번 해보겠다는 대답을 하고 집으로 올라왔다.

흙까지 주섬주섬 묻어있는 그 풀을 받아오긴 했지만 나는 미심쩍어하며 "이걸 해봐 말어" 하며 망설였다. 일단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해보기로 하고 그녀가 일러준대로 해보기로 했다.

먼저 풀에 묻은 흙과 먼지 등을 깨끗이 씻은 후 펄펄 끓는 물에 넣었다. 한 삼십분쯤 삶으니 녹색물이 우러났다. 풀을 건져 그 물까지 짜내어 그걸 큰 함박에 넣고 찬물과 섞어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딸 소연이 몸에 목욕시키듯 끼얹었다. 따뜻한 기운이 기분 좋은지 소연이 제 손으로 끼얹으며 좋아했다.

그렇게 몇번 목욕을 시키고 약도 같이 겸하여 먹였더니 며칠 후 소연이 감기가 뚝 떨어졌다. 난 혼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니 그게 진짜 효과가 있는 건가? 아니면 약 먹고 나은 건가?" 왠지 그 이름모를 풀의 효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90%를 차지하니 소매점 여자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소매점에 아이스크림 사러 들렀는데 내가 말하기 전에 그녀는 먼저 우리 딸 감기가 어떠냐고 물어왔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지난번에 알려준대로 했더니 지금 거의 다 나았어요. 고마워요" 라고 말했다. 그녀는 별말을 다 한다며 수줍은 미소와 함께 양손을 내저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중국사람들은 한국사람에게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속으로는 무시하고 깔보는 경향이 있다고 말이다. 나 또한 중국인에 대한 경계심을 알게 모르게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받은 소매점 여자의 친절에 그 말을 적용시키기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소박하고 진실해 보인다. 그로 인해 내 속에 잠재하던 그 경계심은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조만간 근처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갈 계획이다. 이제 막 정들기 시작해서 서운하지만 그녀의 따뜻한 관심과 친절한 모습은 내 마음에 살포시 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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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동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삶속에 만나는 여러 상황들과 김정들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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