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닥토닥 두드려도 참깨는 잘도 쏟아집니다

장모님과 함께 참깨를 털었습니다

등록 2005.09.10 18:38수정 2005.09.1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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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무렵 교통사고를 당하신 장인어른이 가을이 익어가는 지금까지 병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대형 트럭에 치인 것이라 목숨 건진 게 다행이라고 위안도 해보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고스란히 농사일을 떠맡아온 장모님의 고생은 말이 아닙니다.


고추를 따서 말리느라 허둥대다보니 참깨 털 시기를 놓쳤다는 장모님을 돕기 위해 토요일 오후에 아내와 함께 큰골 밭으로 갔습니다.

이기원

며칠 전에 장모님 혼자 털다 비를 맞았다고 합니다. 비에 젖은 참깨는 싹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얀 참깨를 닮아 하얀 싹이 났습니다. 장모님은 싹이 난 참깨를 쏟아 버리며 시퍼렇게 싹이 났다고 한숨을 쉬십니다.

멍석 대신 천막을 길게 깔고 막대기 하나씩 들고 참깨를 털었습니다. 참깨 다발 거꾸로 들고 막대기를 휘두르면 하얀 알갱이가 우수수 쏟아집니다. 멀찌감치 앉아서 구경만 하면 저게 무슨 일이냐 싶지만 오랜 시간 되풀이하다 보면 팔도 아프고 어깨도 쑤십니다.

그래도 쏴아아 쏟아지는 참깨 소리에 기운이 납니다. 빨리 털고 싶은 욕심에 힘이 들어가면 참깨 대궁이 부러지기도 합니다. 한 번 털고 세워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털어야 하기 때문에 대궁이 부러지면 낭패입니다. 힘 들이지 않고 토닥토닥 두드려도 참깨는 잘도 쏟아집니다.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 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 김준태, 참깨를 털면서 전문



참깨 단에 새카맣게 달라붙었던 개미도 참깨 알갱이와 함께 떨어집니다. 하얀 참깨 위로 떨어진 개미들은 놀라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 위로 참깨 알갱이가 사정없이 쏟아집니다. 가끔은 귀뚜라미도 무당벌레도 함께 떨어집니다.

이기원

이기원

참깨를 다 턴 후 체로 쳐서 이물질을 골라냈습니다. 개미란 녀석들은 끝까지 참깨와 함께 고무 함지 속으로 쏟아져 내립니다. 그 수가 워낙 많아 하얀 참깨가 까맣게 보일 정도입니다. 하는 수 없이 참깨를 천막에 쏟아 넓게 펼쳐 놓았습니다. 개미떼가 도망가기 쉽게 하려는 겁니다.

개미가 흩어질 동안 아내와 장모님은 열무를 솎았습니다. 열무김치를 담글 때 필요하다며 빨간 고추도 따왔습니다. 파도 뽑아가고 늙은 호박도 잘 생긴 놈으로 하나 따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기원

이기원
참깨를 자루에 넣고 열무와 호박과 고추를 싣고 처갓집으로 왔습니다. 걸핏하면 바쁜 사위 불러다가 일만 시켜 미안하다며 장모님이 목삼겹살 끊어다가 푸짐한 밥상을 마련해주셨습니다. 혼자 먹는 밥이 맛이 없다던 장모님도 자네가 와서 입맛이 살아났다며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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