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목구멍만 생각험사 이 고생 허겄시유?"

'주말 농부'들이 보여주는 갖가지 풍경들

등록 2005.09.12 07:21수정 2005.09.12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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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곳은 대전 시내 변두리입니다. 높이가 427m 가량 되는, 도시 근처 산으로선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산자락 아래 살고 있습니다. 시내 복판에서 이곳으로 이사온 지 어느덧 5년이 지났습니다.


집에서 몇 발짝만 걸어가면 산 아래 감자나 고구마, 배추, 미나리 따위를 심어 놓은 밭떼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주말농장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는 현수막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실패로 끝난 주말농장의 꿈

저도 이곳으로 이사오자마자 저런 현수막을 보고 집에서 먹을 채소나 자급자족할 요량으로 주말농장 자리 하나를 얻었습니다. 땅이라고 해야 기껏 두 평에 지나지 않았지만 '초보농부' 혹은 '파트타임' 농부로서야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만큼 황홀했지요.

배추가 자라는 데는 완전 발효된 닭똥보다 좋은 것은 없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귀동냥했던 터라 아는 이에게 부탁해서 닭똥을 가져다가 거름으로 집어넣고 배추를 심었습니다.

모든 준비는 철저하고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산비탈에 있는 그 주말농장 근처에는 가물 때 물을 길어올 개울이 없다는 걸 감안하지 못한 게 큰 실수였습니다. 그해 가을 꽤나 긴 가뭄이 들었고, 저는 아름찬 배추를 거두는 대신 본전도 건지지 못한 얼치기 농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채소만이라도 자급자족을 해야겠다는 제 '파트타임' 농부의 꿈마저 영영 사라진 건 아닙니다. 해마다 배추갈이나 배추모종을 해야 할 때가 되면 마음이 먼저 들썩거리기 시작합니다.

어제는 시간을 내서 제가 '초보농부'로서 실패를 겪었던 그 주말농장 근처를 산책 삼아 돌아다녔습니다. 날씨가 다시 여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착각할 만큼 무더운 날씨였고, 추석을 코 앞에 둔 휴일이었지만 '파트타임' 농부들의 손길은 쉴 줄을 몰랐습니다. 명절에 쓸 고구마를 캔다, 밤을 딴다, 배추 모종을 옮긴다, 저마다 바쁘기 짝이 없더라고요.


비록 제 땅 한 뼘 없고, 제가 심은 곡식이나 채소 따위도 없었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흐뭇했던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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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산책을 떠나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집 골목을 돌아서자마자 한 아주머니가 간짓대로 호두를 따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가지 몇 개밖엔 따지 않고 집안으로 금방 들어 가셨습니다. 아마 호두를 까먹으려고 따는 것보다는 심심풀이 삼아 갖고 놀려고 따신 것 같았습니다.

오랜만에 구경하는 호두 따기 광경이 참 보기에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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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동네를 벗어나려는데 이번엔 연세 지긋하신 아주머니가 혼자 고구마를 캐고 계시는 광경이 눈에 띄었습니다. 다가가서 말을 붙였습니다. 그냥 시장에서 사다 드시지 고생스럽게 고구마 농사를 지으시느냐고 했더니만 대뜸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지 혼자 목구멍만 생각험사 뭘라 이 고생을 허겄시유?"

보나마나 추석에 내려올 손자 녀석들 간식거리로 쓸 고구마를 마련해 두시려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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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길을 조금 더 가자 이번엔 끝물이 다 된 고추를 따고 있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요 며칠 근처를 돌아다녀보니 고추밭마다 병충해 안 입은 곳이 없었습니다.

올 김장 때 고추값이 얼마나 뛰어 오를지 벌써부터 걱정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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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아저씨, 아주머니가 모종을 옮겨 심은 배추밭에 나와 일하시고 계셨습니다. 아저씨는 배추 모종에다 열심히 방충제를 뿌리고 있는데 양산을 받쳐든 아주머니는 한가하기만 합니다.

'따로국밥'이란 말이 떡 들어맞는 경우가 아닌가 싶어 저절로 웃음이 나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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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밤톨이 제대로 여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저씨 두 분이 밤 터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글쎄요, 밤을 따기엔 아직은 좀 철이 이르지 않을까요?

밤나무 가지를 상하지 않게 딸 수 있는 간짓대는 폼으로 옆에 놔두고 밤나무를 마구 후드려 패서 밤송이를 떨어뜨리고 그걸 광주리에 주워 담으시더군요.

밤나무에 가시가 왜 많은 건지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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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이제야 배추 모종을 옮겨 심는 부부를 보았습니다. 근처에 사신다는 이 부부는 정년퇴직 후 취미삼아 주말 농장을 하신답니다. 두 분 다 수건을 둘러쓰고 계셔서 어느 쪽이 부인인지, 남편인지 구별이 안 되지요?

왼쪽이 부인이고 오른쪽이 남편이랍니다. 요즘은 남자들의 피부 관리도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햇볕에 얼굴이 탈까봐 수건을 부인보다 더 푹 둘러썼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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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갑자기 산자락이 온통 연기로 가득합니다. 누가, 무엇을 태우는 중일까요? 가만히 다가가서 봤더니 마른 깻단을 태우시더군요. 한 아저씨가 불을 놓고 계셨고, 아주머니는 연기가 매웠던지 잰걸음으로 그 자리를 피하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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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연세가 얼마나 되셨는지 모르지만 머리가 허옇게 센 할머니가 고구마밭 고랑에 앉아서 고구마 순을 다듬고 계셨습니다.

"할머니, 일하지 마시고 그냥 쉬시지 그래요?"
"아, 죽으면 몰라도 아즉까진 살았응게 꼬무락거려야제."

할머니는 천천히 고구마 순을 벗기십니다. 저 연세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구마순을 벗기고, 그걸로 요리를 만들어서 가족에게 먹였을까요?

할머니의 흰 머리가 새삼 고귀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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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할머니에서 손자에 이르기까지 온 가족이 출동해서 고구마를 캐고 있습니다. 잇몸약 광고던가요? 가수 셋이서 고기를 먹으면서 누군가 "고기는 씹는 맛이지"라고 너스레를 떠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이 가족은 지금 "고구마야 먹는 맛보다 캐는 맛이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패로 끝난 주말농장에 대한 꿈

이렇게 해서 제 주말 농장 구경은 끝이 났습니다. 갑자기 정현종 시인의 시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가 떠오르더군요.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정현종 시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전문


시가 아니라도 사람이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풍경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가 합니다. 그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행복해집니다.

저도 내년엔 주말 농장 한 자락을 얻어 저렇게 풍경으로 피어나 볼 작정입니다.

전에 험하게 '초보' 딱지를 뗐으니 설마 다음에야 또 농사를 영 망치기야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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