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여명의 한서린 잠두봉

병인양요때 1만여명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된 역사의 현장

등록 2005.09.14 11:30수정 2005.09.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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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적 제399호인 잠두봉 유적지

사적 제399호인 잠두봉 유적지 ⓒ cpn


a 아래에서 올려다본 잠두봉

아래에서 올려다본 잠두봉 ⓒ cpn


a 절두산 기념관내에 있는 성모마리아 상

절두산 기념관내에 있는 성모마리아 상 ⓒ cpn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은 한국 천주교의 성지인 잠두봉과 주변에 있었던 양화나루터를 가리킨다. 잠두봉은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66년 천주교에서 잠두봉을 중심으로 성당과 절두산순교기념관을 세우고 주변지역을 공원으로 꾸몄다. 절두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고종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1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이곳에서 처형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성당과 기념관 안에는 이벽(李檗)ㆍ이가환(李家煥)ㆍ정약용(丁若鏞) 등 천주교와 관련된 조선 후기 학자들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광장 안에는 김대건(金大建)ㆍ남종삼(南鍾三)의 동상과 사적비가 있다.


a 절두산 기념관 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와 남종삼 신부의 동상

절두산 기념관 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와 남종삼 신부의 동상 ⓒ cpn

잠두봉 주변에 있었던 양화나루터는 잠두봉이 사적으로 지정된 뒤 추가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 강변 일대에는 조선시대에 도성에서 김포ㆍ강화로 가는 나루터인 양화진(楊花津)이 있었다.

양화진은 한강나루ㆍ삼전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나루의 하나로 진선(津船) 외에 참선(站船) 15척이 있었으며, 후에 조정에서는 관선(官船) 9척을 배치하고 도승(渡丞)을 두어 나루를 관리하게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도승 대신 별장(別將)을 두고 진병(鎭兵) 100여명을 배치하였으며, 어영청(御營廳)의 감독 하에 두었다.

양화진 일대는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나서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고 일컫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사대부들의 별장이나 정자도 강변에 많이 세워져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청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양화진 일대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할 수 있는 개시장(開市場)이 되었다.

a 절두산 기념관 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와 남종삼 신부의 동상

절두산 기념관 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와 남종삼 신부의 동상 ⓒ cpn

조선시대 후기 역사의 흐름과 함께 시대의 많은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가치있는 유적이다. 잠두봉 유적은 한강시민공원과 같이 있어 한강을 찾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둘러볼 수 있으며, 김대건 신부의 동상 주변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절두산순교기념관 안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조선후기 학자들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은 개화기의 혼란 속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곳이다.

덧붙이는 글 | 이수앙 기자는 cpn문화재방송국 소속이며, 이 기사는 IMBC에 동시게재됩니다.

덧붙이는 글 이수앙 기자는 cpn문화재방송국 소속이며, 이 기사는 IMBC에 동시게재됩니다.
첨부파일 잠두봉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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