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 신부 토마스와 안드레아가 아스토르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서 쉬고 있다.김남희
"작년에 내가 읽은 책 중에 '예수는 없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어. 그 책을 읽으며 모든 목사와 신부, 신자들이 이런 믿음을 갖고 산다면 얼마나 평화로운 사회가 될까 생각했었어.
그 신학자는 성경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적으로 진리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믿고, 성공적인 교회라면 교인이 계속 자라나 목사나 교회의 도움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의 독립적인 사고와 믿음을 갖도록 해주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해.
지구와 인간이 겪고 있는 아픔에 '전지구적으로 반응'하고 이를 촉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참된 의미의 종교인,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고, 이런 일을 위해 모인 사람의 무리가 곧 '교회'여야 한다고 말해. 그리고 신이 반드시 아버지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해."
"그럼. 맞는 말이지. 하느님이 반드시 아버지일 필요는 없는 거야. 우리는 신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없어."
이 길을 성지순례 목적으로만 걸어야 해?
"토마스, 넌 유럽의 교회들이 입장료를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성당은 믿는 사람들에게 집이나 마찬가지인데, 집에 들어가는 데 돈을 내라고 하는 셈이잖아. 절도나 물질적 손상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근 교회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 성당을 유지하는 데 돈이 많이 든다면 신자들에게 기부를 요청해야지 입장료를 징수하는 식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봐. 교회는 '기부에 의존한 모금'이라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거야. 대신 입장료를 징수하는 쉽고 안전한 방식을 택하는 거지.
하지만 우리가 예수의 삶을 돌아보면 그분의 삶 자체가 위험과 모험으로 가득한 삶이었어. 그분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택했고, 어려운 길이라고 돌아가는 일도 없었어.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의 삶과는 멀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산티아고를 걷는 동안 만나는 스페인 신부들이 미사에서 보여주는 관습적인 모습은 또 어때?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어떠한 접촉도 없는, 그저 형식적인 미사잖아."
신을 믿는다는 건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에 대해 책임지는 일이고, 지구 위에 벌어지는 아픔을 나누는 일이고, 내 손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손 내미는 일이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모험조차 신에 대한 믿음 하나로 기꺼이 감수하는 게 아닐까? 교회의 성벽에 틀어박혀 내세에 대한 보증보험을 들어두는 게 아니라!
토마스는 이 길에 비종교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몰리는 걸 경계한다.
"카미노를 걷는 일을 스포츠로 즐기는 사람들 때문에 종교적 이유로 걷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그건 부당하지 않아? 이 길은 원래 성지순례의 목적으로 이어져 온 길이잖아."
"하지만 이 길이 성지순례라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걷는 사람만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잖아? 일단 문을 열었다면, 약간의 손해도 감수할 각오를 하는 게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종교적 이유만으로 걷는 사람들만 가득한 것보다는 서로 다른 이유로 걷는 사람들이 있는 게 더 재미있잖아. 나와는 다르게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서 삶이 재미있는 것처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시간은 금세 흐른다. 오늘 걷는 길은 도로를 따라 가는 짧은 길을 버리고 택한, 조금 돌아가는 길. 차가 다니지 않는, 사람의 발길도 뜸해 고즈넉한 길. 이제 메세타를 벗어나기에 초록 나무들이 드문드문 보여 눈과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언제부터인가 걷는다는 행위는 내게 있어 명상이자 존재의 확인 방식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가 걷고 있을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두 발로 걸어서 세상을 열어갈 때, 그 길 위에서 만나는 것들은 전혀 다른 의미와 몸짓으로 내게 다가온다. 걷고 있을 때, 그 때서야 겨우 열리고, 깊어지고, 넓어지는 나. 그게 나의 한계라 해도, 어쩌랴, 내 영혼의 그릇 크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을!
정오가 못 되어 빌라 데 마자리페에 들어섰다. 이 작은 마을에도 알베르게가 세 개, 슈퍼가 두 개나 있다. 내가 온 곳은 두 번째 알베르게. 작은 방마다 4명씩 자고, 인터넷 무료(일하는 청년에게 부탁해 한글까지 깔았다!)에, 작은 정원과 부엌도 있다.
이 곳에서 멕시코인 알렉스를 만났다. 부르고스 성당 앞에 세워둔 배낭을 도난당했던 그 알렉스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여권 신청하고 배낭과 장비를 구입해 부르고스에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했단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돌아와 걷고 있는 그를 보니 존경심이 절로 인다.
독일인 마릴리, 안드레아, 뉴질랜드인 트리나, 크리스티나, 닐스크리스티안, 토마스와 저녁을 먹었다. 마릴리, 안드레아와 트리나가 요리하고, 크리스티나와 나는 식탁을 차리고, 설거지는 토마스와 닐스크리스티안. 저녁을 먹고 난 후 정원에 둘러앉아 토마스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