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말리다 우는 심정 누가 알리오

올 햇볕에 고추 말리기 정말 힘듭니다

등록 2005.09.14 19:45수정 2005.09.14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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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을 따라가면서 하루 열번을 넘게 옮겨주는 요즘 고추가 마를 리 없다.
볕을 따라가면서 하루 열번을 넘게 옮겨주는 요즘 고추가 마를 리 없다.김규환
가을로 접어들면 햇살이 달라진다. 맑기는 하지만 뜨겁지가 않다. 잠시 따갑다가 햇살이 어디론가 숨어버리곤 한다. 처서가 지나면서 지하수가 따뜻해지는 시기에 맞춰 햇볕도 양이 현저히 줄어들고 그늘에 조금이라도 있으면 차가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길이도 짧아 잠시 늑장을 부리노라면 금방 지고 마는 게 가을이다.


한 여름 그렇게 우린 마치 햇볕을 원수 취급하며 살아왔다. 어렵게 여름을 났지만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그 '웬수'가 그립다고 야단인가. 참으로 사람은 간사하기 그지없다. 내가 대표 인사로 낙인을 찍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바로 나라는 인간이다. 김규환!

잘 익었는데 급히 따다보니 풋고추도 섞여 있다. 태양초 말릴 생각에 한껏 부풀었다.
잘 익었는데 급히 따다보니 풋고추도 섞여 있다. 태양초 말릴 생각에 한껏 부풀었다.김규환
이유를 한번 들어보라. 웃기지도 않게 여름엔 덥다고 야단법석을 떨더니 얼마 전부터 사람이 확 달라졌다. 쳐다보지도 않던 그를 몸을 말린다고 밖으로 나가질 않나, 고립된 영혼이라도 가볍고 살가운 가을 햇살에 쬐어 보겠노라며 집구석을 박차고 나간다.

밭으로 가서는 농약도 안치고 기른 100포기 고추가 빨갛게 익었다며 기뻐하며 날뛰었다. 자랑도 보통이 아니었다. 풋고추로 어린이집에 갖다 주고 몇몇 사람들과 나눠먹지 않았다면 정말이지 대단한 수확이 있었을 거라는 뻥까지 쳐댔다.

그러던 어느 날 태풍 매미가 오기 전부터 붉은 고추 한 무더기를 따온 다음날 사람이 이렇게 바뀔까 싶게 돌변했다. 비가 정말 철 천지 원수로 바뀌더니, '전하, 제발 해 좀 제대로 비춰주세요'하며 애걸복걸 하는 거다. 얼마나 올 한해를 엉망으로 살았는지 답은 시원치가 않았다. '전하마!'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무슨 해신은 이다지도 매정한가.

가운데는 가지를 잘라 말리고 한쪽은 꼭지를 따지 않고 한쪽은 땄다.
가운데는 가지를 잘라 말리고 한쪽은 꼭지를 따지 않고 한쪽은 땄다.김규환
맑은 날 기분 좋게 따와서는 밤새 잠을 재웠다가 빨간 태양초로 말리려고 볕에 내놓았다. 그런데 웬걸? 잠시 햇님이 환하게 웃더니 잔뜩 찡그리고 보복을 한다. 한 여름 그렇게까지 홀대하지 않았는데 왜 그럴까? 서울에서 고추 말린다고 강짜를 부리는 건가.


부지런한 나에게 아침에 한번 기회를 주고는 다시 옮겨달라고 한다. 일방통행로 내 차 부근으로 옮겨줬다. 잠시 집에 들어와 밖을 보니 님은 사라지고 없다. '어어~ 정말 나하고 장난하는 거야' 속으로만 생각했지 겉으로까지 드러내지는 않았다. 혹 내가 욕하는 걸 님께서 들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는 미지수 아닌가.

기도하는 심정으로 제발 서너 시간만 맘껏 쫴주기를 바랬다. 그런데 아무 신호가 없었다. 다음날 비가 내렸다.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선풍기를 쐬고 보일러를 틀어주고 뒤집어 주기까지 아이 다루듯 성심성의를 다했다. 난데 없는 호강이다.


이것 저것 잘 마를까?
이것 저것 잘 마를까?김규환
안 되겠다싶어 가위로 쪼개줬다. 그 다음날이었다. 잠깐 반짝하더니 두어 시간 마음을 풀어주고는 그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영영 보여주질 않는다. 그러고 나서 장대비가 쏟아졌다. 집에서 노닌 고추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풀이 죽었고 물기가 가시지 않는다.

난 맘속으로 '그래, 내일 맑을 거라 했어'라며 위로를 하고는 습기하나 없는 바람에 햇살 가득한 날이 어서 밝기를 기다렸다.

선풍기까지 쐬며 호강하는 고추씨(氏)
선풍기까지 쐬며 호강하는 고추씨(氏)김규환
오늘 아침 드디어 날이 밝긴 밝았다. 찬란한 아침 해가 떠서 나를 들뜨게 했다. '그래, 오냐 내가 오늘은 반드시 너를 말려 주리라. 걱정 붙들어 매' 평소대로 요리조리 해를 좆아 옮기기를 열두어 번 공을 들였다.

참 간지럽다. 이토록 내 맘을 몰라주는 해와 씨름하는 내가 부끄럽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살짝 떴다가 사라지고 만다. 며칠 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통고추를 자르고 이삼일 지냈더니 미끈미끈하고 곰팡이가 탱탱 슬었다. 자칫 잘못 하다간 썩힐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햇님이 숨바꼭질을 하니 이랬다간 유기농으로 지어 한 근도 못 건지는 사태가 오고야 말지니 가위로 자른 고추가 병아리 오줌만한 햇살에 또르르 말리고 만다. 안쪽에선 썩는 거나 마찬가지다.

가위로 자르기로 결단을 내리다.
가위로 자르기로 결단을 내리다.김규환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일손을 놓고 매달렸다. 이제는 고추씨를 꺼내고 잘게 나눴다. 나눈 자리는 또다시 말리고 만다. 그러기를 온 종일이었지만 건물과 건물로 들어오는 좁쌀만한 햇볕에 먼지만 풀풀 뒤집어쓰고 말았다.

엉겁결에 눈을 만졌더니 치뜨지도 못하게 맵다. 눈물을 하염없이 쏟는 수밖에 없었다. 눈이 매워서 울고, 일주일 사이 비누 한 장 날려서 서럽고, 고추가 마르지 않아 슬프다. 아직도 내 손은 얼얼하게 맵다.

해가 구름에 가리고 건물에 가려 옥상도 없는 도시에서 고추를 말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먼지는 또 얼마나 많은가.
해가 구름에 가리고 건물에 가려 옥상도 없는 도시에서 고추를 말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먼지는 또 얼마나 많은가.김규환
방에서 같이 살다보니 코마저 매워 재채기를 자주 한다. 얼굴도 따갑다. 아이들에게 미안한데 고추는 여전하다. 마르는가 싶더니 내일 하루를 꼬박 내놓아도 바삭바삭해질지 모르겠다. 아이구나. 차라리 차에 실어 종일 볕이 드는 들로 나가 책이나 한권 읽고 올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말려봤자 두어 근이나 될지 모르는 이만한 고추 가지고 헤매는 내 꼬락서니는 또 뭔가. 에라. 오늘도 하루를 허비하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힘든 고추말리기는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곰팡이가 탱탱 슬어 속을 다 파냈다. 고추씨 따로 놀고 껍질이 분리되어 잘게 부서진 못난 고추인데 이제 하루 지나면 얼추 마를 성 싶으니 근 일주일이 걸렸다.
곰팡이가 탱탱 슬어 속을 다 파냈다. 고추씨 따로 놀고 껍질이 분리되어 잘게 부서진 못난 고추인데 이제 하루 지나면 얼추 마를 성 싶으니 근 일주일이 걸렸다.김규환

덧붙이는 글 | 태양초로 말리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생각해 봅니다. 찌지 않고 진짜 볕에만 말린다면 몇 만원이어도 아깝지 않을 겁니다.

덧붙이는 글 태양초로 말리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생각해 봅니다. 찌지 않고 진짜 볕에만 말린다면 몇 만원이어도 아깝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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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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