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주문을 거절했다!

내가 출판사의 번역의뢰를 거절한 이유

등록 2005.09.15 17:31수정 2005.09.15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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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주문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작가이자 번역가라는 타이틀을 달고는 있지만 나 역시 글품을 세상에 파는 노동자이니 주문이란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책이 세상에 나온 지 4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 일로 밥을 먹고사는 소위 전업이 된 지는 1년이 조금 넘었고 그간 세상에 나온 책 숫자는 열 권 남짓 된다.

12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이 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도 4년 전이었다.

'평생직장'이 아닌, '평생직업'이라는 말이 내 머리 속을 가득 메우고 있을 때기도 했지만 함께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내겐 몹시도 힘겨웠다. 그때부터 구체적인 작가수업을 시작했다. 이미 그 전에 글을 써 큰 상도 몇 번 받았고, 그 포상으로 해외여행도 두어 번 다녀왔기에 글 쓰는 데는 웬만큼 자신이 있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신촌에서 하는 번역 강의를 찾아냈다. 그런데 강의 시간이 문제였다. 강의는 금요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한 학기 동안 진행되었는데 열 명도 채 안 되는 회사에 다니던 나는 금요일마다 매번 보건휴가, 월차, 연차, 조퇴를 신청하려니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었다.

당신들은 근무 시간 아무 때나 당구장이며, 사우나를 찾아 들락거리면서도 내게 법적으로 허락된 휴가를 찾아 쓰는 것을 눈치 보게 했던 게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의 분위기였다. 나 또한 꼭 주말연휴를 맘껏 즐기려는 얌체족처럼 보일까 동료들에게 미안해, 한 달에 한 번씩은 눈물을 머금고 어쩔 수 없이 강의를 빼먹곤 했다.

어쨌거나, 자의반 타의반 드디어 나는 12년간 다니던 회사에 종지부를 찍고 이른바 전업작가가 되었다. 얘기가 너무 옆으로 샌 것 같다. 다시 주문을 거절한 얘기로 돌아가 보겠다.


그러니까, 주문전화가 걸려온 출판사는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번역을 했던, 소위 출판계에서는 대기업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번역료도 경우에 따라서 다른 곳보다 짭짤한 편이었다.

1년 전에 그 회사의 전집에 들어가는 책을 한 5권 번역했다. 동화였다. 동화 번역은 내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이다. 올해 초, 드디어 내가 그 회사에 번역을 해주었던 그 책들이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출판사에 책을 보내 달라 이메일을 보냈다. 보통, 책이 나오면 출판사에서 알아서 먼저 저자에게 넉넉하게 책을 보내준다. 그런데, 요즈음은 출판사 직원들의 이직이 잦다보니 담당자들도 자주 바뀌어 번역자 연락처를 잘 잃어버리곤 한다. 시간이 오래 걸려 세상에 나오는 책일수록 경우가 더 심하다.


다행히 담당자는 바뀌지 않았는데, 사무실에 내게 보내줄 여유분이 없단다. 재고가 들어오는 대로 보내주겠단다.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조금 더 못 기다릴까. 그러마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다시 이메일을 보내며, 이번엔 싫은 소리를 좀 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그 회사와 거래하는 걸 싫어하는 것 같다고(사실이 그렇다. 주위 번역가들은 그곳의 일을 버거워한다). 싫은 소리 덕분인지 그 다음 날 책이 택배로 도착했다.

그쪽 편집자는 별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좋은 번역자를 발굴했는데, 이런 하찮은 일로 틀어져서 안타깝다나 어쩠다나. 나보다 나이도 어린 편집자가 나를 발굴했다는 표현도 기분이 나빴거니와, 약간의 성의만 있으면 서로 불쾌하지 않았을 일을 큰 회사의 시스템 탓으로 핑계를 돌리는 것도 몹시 불쾌했다. 알맹이 없는 인사를 주고받고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지난 달 그러니까 그 일이 있은 후 5개월 만에 그 회사에서 전화가 온 것이다. 그 편집자는 아니고 그 아래 직원인 것 같았다. 마침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일도 있었지만 웬만해서는 주문을 거절하면 안 되는 4년차 번역작가는 그 주문을 끝내 거절하고 말았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그 회사의 주문은 늘 촌각을 다툰다. 교재로 사용되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원고를 비틀기도 하고 영 엉뚱한 결말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것은 내가 주문을 거절하는데 있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에게 결례하지 않으며, 성의를 다하는 사람들과 거래하고 싶다. 돈을 좀 덜 받더라도 말이다. 아마도 그쪽에서는 '이제 좀 컸다, 이거지.'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흙사랑 물사랑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흙사랑 물사랑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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