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추석 준비, 아들은 시험 준비

등록 2005.09.17 15:28수정 2005.09.1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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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기간에 할아버지 댁에 가는 걸 준수 녀석이 부담스러워합니다. 연휴 끝나고 며칠 뒤에 중간고사가 있다는 겁니다. 책을 가지고 가라고 했더니 시골에선 공부가 안 될 거라며 제사와 성묘만 마치고 금방 돌아오길 바라는 눈치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서운해 하셔서 안 돼."

아내까지 나서서 시험 타령을 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아 일단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녀석의 처지가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시험에 가위눌려 사는 게 어디 녀석뿐이겠습니까. 엄마, 아빠 졸라 아예 집에 틀어박혀 공부만 할 거라는 친구도 꽤 있다고 했습니다.

이기원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추석 음식 준비를 집에서 다 해가지고 가자는 것입니다. 대신에 준수는 그 시간을 이용해서 미리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대신 추석날은 시골에서 좀 여유 있게 지내다 오자고 했습니다.

맏며느리인 아내는 일찍 가는 게 일손을 더는 일입니다. 시어머니와 동서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아들이 공부하는 게 낫다며 혼자 음식 장만을 하겠다고 팔을 걷었습니다.

준수 녀석은 아침부터 제 방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고 아내는 잠 깨자마자 새벽시장에 들러 제사 음식 재료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결혼을 앞둔 사촌 동생이 둘이나 있어 신부될 사람을 데리고 와 인사시킬 거라며 평소보다 음식에 더 신경을 씁니다.


이기원
혼자 손으로 감당하기 힘든 아내는 둘째 광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다행히 광수 녀석은 시험 날이 잡히지 않았다며 순순히 엄마 일을 도와줍니다. 파 다듬고 계란 깨서 풀어놓고 엄마 옆에 앉아 이것저것 도와줍니다. 두부도 노랗게 구워놓고 산적도 제법 잘 뒤집어 놓습니다.

"광수가 딸 노릇 다 하네."


메밀가루 풀어 부침개를 부치던 아내가 웃으며 한 마디 했습니다. 엄마의 칭찬을 들은 광수는 신이 나서 흥얼대며 노래도 부릅니다.

어린 시절 마당가 그늘에서 화로에 솥뚜껑 뒤집어놓고 부침개 부치던 어머니는 주변을 서성대는 아이들보다 먼저 할머니께 부침개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던 말씀이 있었지요.

"첫 부침개는 애들이 먼저 먹으면 안 된다."

할머니가 먼저 맛보신 뒤에 아이들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부침개 한 점 얻어먹고 밖으로 뛰어나가면 고개 숙인 벼이삭 사이에서 쉬고 있던 메뚜기가 놀라 달아났습니다.

아내는 광수를 시켜 접시를 가져오게 하더니 부침개를 담아 간이 제대로 맞는지 먹어보라며 건네줍니다. 파와 백김치를 넣어 부친 부침개의 짭짤한 맛이 어릴 때 먹던 바로 그 맛이었습니다.

"준수도 나와 부침개 먹어라."

아내가 불렀습니다. 제 방에 틀어박혀 꼼짝 않고 공부하던 준수가 나왔습니다. 시험 준비로 바쁜 녀석이 추석 준비로 바쁜 엄마가 부쳐준 부침개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 올리고 고향으로 떠납니다. 제 고향은 강원도 횡성입니다. 오마이뉴스 가족 여러분 풍요럽고 인정 넘치는 행복한 한가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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