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야, 너 땜에 우리 아버지 많이 아프다

추석연휴 폭우로 날아간 풍년의 꿈

등록 2005.09.20 17:30수정 2005.09.21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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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 첫 날인 토요일 아침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바람이 점점 세지고 금세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아버지는 형하고 저를 불러 비닐하우스를 단단히 동여맵니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서둘러 논으로 가십니다. 몰아치는 비바람 앞에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련만 형과 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버지는 논으로 향하십니다.


점점 기운이 없어져 조그만 언덕길마저 오르지 못해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시는 횟수가 많은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걱정돼 뒤늦게 우비를 챙겨 입고 아버지 뒤를 따릅니다. 아직 비가 오지도 않았건만 바람의 힘을 견디지 못해 지친 듯 여기 저기 누운 벼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돼도 괜찮습니다. 만약 이 상태에서 비가 온다면 벼는 모조리 쓰러지고 말 겁니다.

우리 논은 큰 둑 밑에 있어 바람이 둑 때문에 빠져 나가지 못해 같은 논이라도 옆 논보다 항상 피해가 컸습니다. 아직까지는 비가 안 와서 그런지 다른 논은 그나마 멀쩡한데 이렇게 우리 논만 벌써부터 기울어져 있으니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논의 피해가 더 클 것 같습니다.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집에 가자고 해도 아버지는 하염없이 논을 바라봅니다. 그런 아버지 뒤에서 저는 아버지를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가자고 팔을 끌어당깁니다. 아버지가 알았다면서, 잠깐만 놓아보라고 하면서 저를 뿌리치고는 갑자기 논으로 들어가십니다. 가까이에 있는 쓰러진 벼들끼리 묶어 놓습니다. 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그런 아버지를 지켜봤습니다.

저거 몇 개 묶는다고 이 비바람에 벼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아버지도 아십니다. 하지만 그저 안쓰러운 마음에 하시는 일이니, 묶은 벼처럼 속상하신 마음에 약해지실 아버지 마음도 단단히 묶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것들 다 쓰러지면 어떻게 하냐?"
"괜찮을 거예요. 어휴, 그리고 좀 엎치면 어때요. 그냥 몇 가마 덜 먹는다고 생각하세요. 난 아버지가 더 걱정이네요. 속상한 마음 돌리시고 좋은 생각만 하세요. 추석에 이렇게 자식들 건강한 모습으로 모두 모였으면 됐잖아요. 비 와요. 빨리 집에 가요."
"그려, 네 말이 맞다. 늘그막이 자식들 건강하고 손주 새끼들 잘 크니 그걸로 됐지 아버지가 뭘 더 바라겠냐. 다 잘 되기를 바라면 그건 욕심이지 욕심. 어여 가자 비 맞을라."


제가 입고 있던 우비를 벗어 아버지에게 주었지만 아버지는 한사코 저보고 입으라고 하십니다. 잠깐 생각하다가 그냥 제가 입었습니다. 아버지는 비 맞고 자식은 우비 입고 간다면 보는 이들이 불효자식이라고 욕을 하겠지만 그냥 아버지 말씀대로 제가 입었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그리 하는 것이 자식의 작은 도리라 생각했습니다.

a 예전에 농약을 준비하시던 아버지. 추수를 앞두고 내린 하룻밤 폭우에 '풍년의 꿈'이 날아가버렸습니다.

예전에 농약을 준비하시던 아버지. 추수를 앞두고 내린 하룻밤 폭우에 '풍년의 꿈'이 날아가버렸습니다. ⓒ 장희용

집으로 오는 동안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발걸음만 재촉하실 뿐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이따금씩 아직은 멀쩡한 이웃집 논을 보십니다. 그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버지는 지난 번 고추가 다 죽어 중간에 고추를 뽑아내실 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곡식들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시면서 남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논밭을 돌보는데 당신은 아파서 자주 밭에 못 나가 고추가 죽어버렸다며 병에 걸려 죽은 고추를 당신 탓으로 돌리셨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혹여 당신을 책망하지 않나 걱정이 앞섭니다.

집에 채 오기도 전에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바람이 몰아칩니다. 무섭게 내립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제가 걱정됐는지 대문을 막 나서려고 하십니다. 어머니는 '벼 괜찮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를 보시고는 직감적으로 벼가 쓰러진 것을 예감하신 어머니는 혹여 아버지 마음이 더 상하실까봐 묻지 않으신 겁니다.

점심 때가 되자 비가 더 매섭게 내립니다. 쏟아 붓습니다. 사방이 컴컴합니다. 장독대에 있던 세수대야가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요란스러운 소리를 냅니다. 방 안에 계시는 아버지 마음이 더 심난해질까봐 주워서 마루 밑에 집어넣습니다.

함석으로 지은 집이라 빗방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비는 그렇게 밤새 내렸습니다. 문득 눈을 떠 휴대폰을 보니 아침 6시가 넘었습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비가 조금은 기세가 줄었지만 여전히 많은 비가 내립니다.

아버지는 벌써 논으로 가신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올 때가 다 되었으니 그냥 더 자라고 하지만 저 또한 얼마나 엎쳤을까 걱정이 되는지라 아버지가 계신 논으로 향합니다.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는 논은 모조리 엎쳤습니다. 우리 논을 가보지도 않았건만 꼭 우리 논 같아 보여 '어떡한대'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이곳저곳 쓰러져 있는 벼만 보입니다. 간혹 한 군데도 쓰러지지 않은 채 멀쩡한 논도 있습니다. '제발 조금만, 제발 조금만'이라는 간절함이 마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납니다. 논이 가까워지니 가슴이 뜁니다.

'싹 다 엎쳤으면 어떡하나.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쳤으니 다 엎쳤을 텐데.'

논에 도착했습니다. 그냥 발걸음이 멈춰집니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논의 2/3 정도는 엎쳤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버지 위로한답시고 '그까짓 것 좀 덜 먹으면 어때요' 했던 나였건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모습을 보니 그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이었나 생각이 듭니다.

한쪽 방향으로 곱게 쓰러지면 그나마 보는 마음 덜 아프련만, 이리저리 엉키고 설쳐 엎쳐진 벼를 보니 마음을 추스르기가 어려워집니다. 곡식을 키우는 마음을 알지 못하는 제가 이럴진대 아버지 마음이 오죽할까 하는 생각에 아버지가 서 계신 곳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봅니다.

"이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다. 집 앞에 논하고 저기 논하고는 안 엎치고 이 논만 엎쳤더구나."
"그러게요. 어제 비바람 몰아친 기세로 봐서는 전부 다 엎칠 줄 알았는데 아버지 말씀대로 이 정도로 그친 게 그나마 다행이네요."

아버지는 남은 두 개의 논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서 애써 속상한 마음을 외면하십니다. 저도 웃으면서 아버지 말씀에 맞장구를 쳤습니다. 달리 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피해를 입지 않은 논을 말씀하시면서 괜찮다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셨지만 말씀 하시는 횟수만큼이나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괜찮다고 하시는 것은 그냥 당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애써 찾은 이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a 벗어 놓은 아버지 고무신. 마루에 앉아 아버지 고무신을 바라보는 데 알 수없는 서글픔이 마음에서 눈으로 밀려나옵니다.

벗어 놓은 아버지 고무신. 마루에 앉아 아버지 고무신을 바라보는 데 알 수없는 서글픔이 마음에서 눈으로 밀려나옵니다. ⓒ 장희용

추석 연휴, 하루 사이에 제 고향인 홍성에는 208㎜, 인근 지역인 예산은 298㎜ 비가 내린 것을 비롯해 아산 253㎜, 천안 218㎜의 비가 내렸습니다. 많은 가옥과 1832ha에 이르는 농경지가 피해를 입었고, 수만 마리의 가축이 폐사되는 등 피해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잠정집계 피해액이 120억 원대를 넘어섰고,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 피해액이 늘어날 것이라고 하니 적지 않은 피해입니다.

하지만 더 큰 피해는 수해를 입은 분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많은 것을 잃었고, 또 그것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즐거워야 할 명절에 이런 일을 겪었으니 살아가는 동안 두고두고 가슴에 아픔으로 남을 것입니다.

추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지금, 그저 빨리 추수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쓰러진 벼들을 보는 아버지 마음 덜 아프게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번 추석은 그리 달갑지 않은 추석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피해 입으신 분들에게 작게나마 힘내시라는 말을 올립니다.

덧붙이는 글 이번 추석은 그리 달갑지 않은 추석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피해 입으신 분들에게 작게나마 힘내시라는 말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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