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 땜에 속시끄러워 죽겠다"

등록 2005.09.21 09:50수정 2005.09.2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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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일에 묻혀 살던 아내와 함께 처갓집에 와보니 처형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아내도 처형도 맏며느리라 명절 다가오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힘든 명절 넘기고 연휴 마지막 날을 친정에서 두 자매가 만나 '언니야', '봉순아' 부르며 떠들다보면 명절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풀린다고 합니다.


"약수터 가는 길에 물 많지 않나?"

포항에서 십년도 넘게 살아온 처형의 말에는 경상도 억양이 자연스럽게 묻어납니다. 살다가 힘든 일이라도 있으면 전화해서 '속시끄러워 죽겠다'는 말을 해서 '그놈의 속시끄럽다는 말 좀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고 아내에게 구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5년 전에 남편을 묻고 혼자 힘으로 두 아들 키우며 힘겹게 사는 처형입니다.

이기원
"비 많이 와서 물 못 건넌다."

장모님의 만류로 약수터 가는 건 포기하고 섬강 줄기를 따라 산책을 나갔습니다. 올해엔 추석이 너무 일러 알밤도 제대로 줍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섬강을 따라 걷다보니 가을의 정취가 물씬 느껴졌습니다.

"언니야, 힘든데 여기 앉아 쉬자."
"벌써 힘드나?"
"시댁에서 일하느라 앉아보지도 못했다."
"시동생 하나밖에 없다했잖아."
"시아버지 형제가 많아 손님이 많아."


처형과 아내는 강변 갈대 숲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알콩달콩 사는 얘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국희 군대 언제 가?"
"아직 멀었다."
"그럼, 요샌 뭘 해?"
"만날 방구석에 처박혀 놀고 있다."
"그 녀석 어디가 자격증이라도 따라고 해."
"말도 못 붙인다. 지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소리 질러서."
"집에 무서운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걔 땜에 속시끄러워 죽겠다."
"언니, 또 그 얘기 한다."


처형네 첫째 아들이 전문대 다니다가 군대 간다고 덜컥 휴학을 해서 1년이 다 되는데 군대도 못가고 빈둥대고 있습니다. 혼자 몸으로 돈벌이에 바빠 허둥대다 집에서 빈둥대는 아들을 보면 속이 터진다고 합니다. 이따금 야단도 쳐보지만 머리가 컸다고 엄마 말은 듣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럴 때면 먼저 간 남편이 원망스럽다고 합니다. 무서운 아버지라도 있어 흠씬 두들겨주면 정신이라도 차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언니야, 국희도 생각이 있겠지."
"생각은 무슨……."

이기원
두 자매가 나누는 대화를 옆에 앉아 듣다가 슬그머니 일어섰습니다.

풀을 베어 소 먹이던 시절에는 강가의 풀이 자랄 틈이 없었는데 풀이 아닌 사료를 먹여 소를 기르는 지금 강가에는 갈대를 비롯한 다양한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풀 우거진 강변을 따라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기원
말없이 흐르는 게 어디 물뿐이냐고 정희성 시인은 말했습니다. 말없이 흐르는 섬강의 물줄기가 세월처럼 흘러 처형의 아픈 가슴을 치유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희성 시인의 시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전문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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