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시들해지면 장날 구경 해보세요

닷새마다 열리는 신탄진 5일장 풍경

등록 2005.09.24 10:18수정 2005.09.2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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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신탄진 장에 다녀왔습니다. 옆집 사는 태호네 엄마가 할 일 없으면 장날 구경이나 갔다오자고 해서 얼결에 따라 나섰지요. 딱히 사야 할 물건도 없이, 그냥 장터를 서성거리다 왔습니다.


신탄진은 행정구역상으로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속합니다. 신탄진 장은 대도시에 남은 몇 개 안되는 5일장이랍니다. 신탄진 장은 3일, 8일 이렇게 열립니다. 마침 지난 18일은 추석이었으니, 한 번을 건너 뛰어서 그런지 어제따라 유난히 장사꾼이 많이 나온 듯했습니다. 신탄진 역 앞에 늘어선 장터가 굴다리를 지나서 1km도 넘게 들어 앉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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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시끌벅적한 시장을 속되게 이르는 말, 도떼기시장이란 말 아시지요? 어제 신탄진 장날이 바로 그렇더라구요. 어떤 곳은 정말 발 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거짓말 한 말만 보태면 정말 사람에 치어 죽을 정도였습니다.

대전은 전국 어느 곳보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가 많은 곳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케케묵은 장날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가 무엇이겠는지요? 그건 아마도 그런 대형마트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사람 사는 맛을 그리워하는 것 아니겠어요?

정찰제가 아닌 장터에서는 서로 밀고 댕기는 흥정마저도 정겹습니다. 흥정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과정이야말로 장날 구경의 포인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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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한적한 곳에 펄썩 주저앉은 아주머니 한 분이 고추 꼭지를 따고 있습니다. 저렇게 고추 꼭지라도 따고 있으면 손님 기다리기가 지루하고 따분하지 않겠지요.


어서 빨리 손님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아주머니가 더 이상 한가로이 고추 꼭지나 따고 있을 시간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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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약초 사려고 물어보는 아주머니에게 어디에 쓸 거냐고 물어 봅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아저씨도 풍월을 읊을 만큼 약에 관한 지식이 쌓여 있나 봅니다.


아마도 민간의약의 전승은 저런 분들에 의해 질기고 질긴 생명력을 얻어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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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생선 파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 가 있습니다.

"요사 사람덜, 입만 열면 웰빙 웰빙 허는디 생선 많이 먹어야 웰빙 허지유."

저도 웰빙을 위해서 아주머니한테서 고등어 두 손 샀습니다. 제가 사드린 고등어 두 손이 아주머니의 웰빙에 조금이나마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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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곡물 장사 아저씨네 잡곡들 꽁무니에 "천원만 줘요"라고 쓰인 글귀가 매달려 있습니다. 저렇게 봉지가 큰데 기껏 천원씩에 팔아 넘긴다면 아저씨의 웰빙에 지장이 없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장사가 밑지고야 팔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너무 싸면 사는 사람이 괜히 걱정이 되더라구요. 값이 터무니 없이 싼 걸 보면 아무래도 중국산이 아닌가 싶은데, 원산지 표시가 보이질 않으니,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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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이번에는 버섯장사 아줌마를 만났습니다. 버섯을 뭔 맛에 먹느냐구요? TV에 나오는 선전을 잠깐 빌리자면 그야 쫄깃쫄깃 씹히는 맛이지요. 버섯 좋아하시는 분은 고기 먹을래? 버섯 먹을래? 물으면 당근 버섯 먹는다고 대답한답니다.

가운데 있는 약간 까만 버섯이 능이버섯이랍니다. '1능이, 2송이'라고 부를 정도로 맛있는 버섯이지만, 비싼 게 흠이지요. 잘 먹는 분들은 저 버섯으로 회도 쳐 먹는다는군요.

왼쪽이 싸리버섯입니다. 어렸을 적에 많이 먹었던 버섯입니다. 쫄깃쫄깃한 맛이 일품이지요.

아줌마께 들으니 올해는 한참 버섯이 올라올 시기에 비가 많이 와서 버섯이 나질 않았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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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호박 몇 개와 푸성귀 몇 숨을 가지고 나온 반백의 할머니가 옆집 아주머니가 물건 파는 걸 부러운 듯이 쳐다보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참깨 두 되, 박콩 세 되, 오례쌀 네 되
그리고 똘기밤 서네 되를
머리에 이고 양손에 봇짐 들고
장 길을 나선다
땅에 닿을 듯한 키에
어머니를 따르는 그림자도 미안한지
어머니의 앙가슴 속으로 기어들고
곡식을 팔아도 내 월사금을
맞출 수 있을지 한숨만 내쉬며
이십리가 넘은 장 길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다
해는 강물에 떨어져 유유히 흐르고
장 길을 되돌아오는 머리 위에는
눈처럼 하얀 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허리춤에서 꺼낸 쪼깃 쪼깃한 지폐 몇 장
새가 되어 허공에서 날아와
내 멍든 가슴을 쪼아댄다

- 김정호 시 '장날'


아마 저 학교 다닐 적에 우리 어머니도 "곡식을 팔아도 내 월사금을 맞출 수 있을지 한숨만 내쉬며" 저렇게 태인장에 나가 곡식 자루 앞에 두고 하염없이 앉아 계셨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장날에 저렇게 나와 계신 분들을 바라보면 다 우리 어머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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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이 아주머니 역시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손을 옴지락거리며 뭔가를 다듬고 계십니다.

장사가 안되는 걸 보고 우리는 흔히 '파리 날린다'고 합니다. 아주머니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실지도 모릅니다.

"아따, 파리라도 날라다녔으면 좋겄구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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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이번엔 열심히 칼국수를 밀고 있는 총각(?)이 눈에 띕니다. 나이도 아직 젊은데 칼국수 미는 솜씨가 제법입니다.

아직 장가 전인지, 아니면 결혼을 했는지 모르지만, 저렇게 생활력이 왕성하고 열심히 살려는 총각들을 보면 괜히 중매들고 싶은 맘이 발동하곤 합니다. 이것도 흔히 말하는 아줌마 근성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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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북적거리는 한 길가를 벗어나 한적에 골목에 전을 편 아저씨가 칼을 갈고 계십니다.

'살림에는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물건을 고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산다는 뜻이겠지요. 살림은 그렇다치고 요리에는 '칼이 보배'입니다.

살림하는 아줌마 입장에선 칼이 잘 들지 않으면 얼마나 속상하는지 모릅니다. 잘 안드는 칼과 말 안 듣는 남편은 주부들에겐 '공공의 적'이 분명해 보입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는 게 시들해지면 장날 구경을 해보라고 말입니다. 값나가는 물건이든 하찮은 물건이든 하나라도 더 팔려고 얼마나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지 바라보면 아, 사는 건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대형마트에 밀려서 재래시장은 고전하고 있고 5일장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지요.

어제 장터에 구경가서 삶의 활력을 많이 담아온 덕인지, 오늘은 제법 활기있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여러분도 기회 되시면 언젠가, 이곳 신탄진 장터에 한 번 구경오세요.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아닌 신탄진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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