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목 길게 빼는 소리가 들리세요?

그리운 스와니가 돼 버린 나 자신을 발견하며...

등록 2005.09.27 06:32수정 2005.09.2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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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는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한해살이풀입니다. 코스모스는 꽃대가 터무니 없이 길어서 마치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여인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6월에서 10월 사이에 피고 진다지만 요즘이야말로 코스모스가 한창 피어나는 제철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춘기 시절 길가에 심어진 코스모스는 차라리 신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멕시코가 원산이라는 이 꽃은 자생력이 없어 제 씨를 멀리까지 퍼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코스모스는 흔치 않은 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교문에서 부터 시작해서 길 양쪽으로 죽 코스모스를 심어가던 일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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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곡마단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는
코스모스의
지역.

코스모스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위도

정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일생.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소녀의
지문


- 박용래 시 '코스모스' 전문


돌아오지 않는 소녀의 지문


그토록 가냘픈 몸으로 이리저리 하늘거리면서 하늘을 향해 핀 모습은 정말 소녀같았습니다. 그러나 꽃이 지고 나면 꽃대만 남은 모습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어찌 꽃이 피어서 지기까지 한결같이 아름답기만을 바라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그토록 아름다웠던 꽃이 남긴 뒷모습은 환멸스럽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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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시인은 코스모스를 '돌아오지 않는 소녀의 지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차라리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지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길을 바라보면 한없이 걸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지문'을 찾아서 어딘가로 떠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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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다는 것. 가까이 가고 싶지만 바라만 본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요? 바라는 대상에 끝내 다가가지 못하고 그냥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 초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노래 하나가 생각납니다.

머나먼 그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 날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 이 세상에 정처없는 나그네의 길/ 아, 그리워라 나 살던 곳 멀고 먼 옛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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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스와니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 노래를 부를 때면 슬펐습니다. 제가 마치 타향에서 헤매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 같기도 해서 슬펐고, 스와니가 갈 수 없을 만큼 먼 곳이라서 슬펐습니다.

나이가 들고 더 이상 동요가 저의 삶을 어루만지는 노래가 될 수 없었을 때 저는 스와니를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대신 스와니를 대신하는 것들이 생겼지요. 결혼을 하고나자 남편과 아이들이 제게 스와니가 돼 주었습니다. 가까운 스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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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어제는 문득 마음 속에서 영영 지워진 줄 알았던 '멀고 먼 스와니'가 되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컴퓨터에 앉아 타자를 치다가 우연히 제 옆에 얌전히 앉아 제 명령을 기다리는 복사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나 복사기나 다를 게 없는 신세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지요. 저도 날마다 A4 용지 한 장만큼의 일상을 복사해내고 있거든요.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니 올해만 해도 벌써 258장인가, 259장인가의 일상을 복사해 내고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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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스와니'를 찾아서

집을 나와 무작정 차를 달렸습니다. 길가에는 빨간 코스모스, 하얀 코스모스가 사이좋게 만발해 있더군요. 그렇게 한없이 달려가면 스와니라는 동네가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아, 그리워라 나 살던 시간."

'소녀의 지문'이 남아 있는 곳. 그렇게 그리웠던 스와니를 잊고 살았던 시간들이 안타까워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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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코스모스가 된 식구들

그러나 가도 가도 스와니 마을은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누가 그 마을을 철거해버린 것일까요? 제 '소녀의 지문'이 남아 있는 곳을. 할 수 없이 차를 돌려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벌써 사방은 어둑어둑해졌고 저녁 식사 시간도 훨씬 지나 있었습니다. 남편이고 아이들은 다들 배가 고파서 목을 길게 빼고 앉아 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목을 길게 빼고 있는 게 코스모스가 따로 없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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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자

어느 새 스와니가 돼 있는 나

으이그, 이 불쌍한 코스모스들. 내가 없으면 자기네들끼리 나가서 사먹든지 아니면 라면이라도 끓여먹을 일이지 마냥 앉아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지 뭡니까? 대충 밥을 짓고, 되는 대로 반찬을 해서 저녁을 먹였습니다. 식구들의 포만감에 가득찬 얼굴을 보면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어느 새 식구들에게 '스와니'가 되어 있는 저 자신을 말입니다. 이제 올 가을에는 당분간 '스와니'를 찾아 나서지 않으리라고 맹세 했습니다. 그 맹세를 어떻게 믿느냐구요? 그러는 분들은 옛날 학교 다닐 때 아침 저녁으로 외던 '국기에 대한 맹세'는 그대로 다 지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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