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린에서는 영국총각들을 조심하라?

[해외리포트] 800년 고도에 불어 닥친 개방의 바람

등록 2005.09.27 20:22수정 2005.09.28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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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탈린에 가면 영국젊은이들을 조심하라는 경고성 정보가 실린 에스토니아 여행정보지.

탈린에 가면 영국젊은이들을 조심하라는 경고성 정보가 실린 에스토니아 여행정보지. ⓒ 서진석

'탈린 구 시가지를 밤에 돌아다니다 볼썽사납게 생긴 옷들을 전부 똑같이 차려입고 시끄럽게 영어로 이야기하면서 펍을 돌아다니는 젊은 사람들 무리를 보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그들은 결혼하기 전 마지막 날들을 즐길 수 있도록 친구들이 준비해주는 총각파티를 벌이기 위해서 영국에서 온 파티꾼들입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사람들은 그냥 조금 놀아보자고 온 젊은이들일 수도 있고, 탈린이 싼 맥주와 싼 여자들의 본거지라고 선전한 영국 홍보회사들의 말을 믿고 몰려온 성가신 시골뜨기들일 수도 있습니다.

머리를 밀어버리고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영국 사람들이 탈린 구시가지에 얼마나 더 밀어닥칠지는 모르지만, 런던-탈린 간 저가항공사의 취항으로 인해 더 많은 파티꾼들이 몰려오게 될 것 같습니다.'


영국 관광객을 잔뜩 비꼬고 있는 이 글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외국관광객을 대상으로 매달 영어로 발행되는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의 관광안내책자에 실려 있는 문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 책자는 '총각파티를 하기 위해 탈린을 찾는 영국인들을 조심하라'는 제목으로 위 글을 일면에 실었다.

탈린 관광안내청은 왜 영국 관광객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게 된 걸까.

800년 고도 '탈린'에 불어닥친 개방의 바람

a 800년의 고도 탈린, 관광철이 끝난 가을철이지만 여전히 사람이 많이 붐비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800년의 고도 탈린, 관광철이 끝난 가을철이지만 여전히 사람이 많이 붐비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 서진석

800년의 역사를 갖춘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 탈린의 구시가지 곳곳에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평균 4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건물들이 흩어져 있다.


체코의 프라하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탈린이지만 구 소련 시절, 두터운 철의 장막으로 인해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서유럽 각지에서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탈린의 아담한 구시가지는 이제 일년 사시사철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기에 2004년 5월 1일 유럽연합 가입은 에스토니아 사회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서유럽으로의 문이 열리자마자 정치, 경제, 문화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그 변화의 소용돌이는 고요하던 탈린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유럽의 초저가 항공사들은 곧바로 탈린과의 취항을 연결했다. 저가항공사들은 항공기 내의 무료서비스를 모두 없애는 등 경비를 최소화하는 정책으로 상상도 못할만한 저렴한 요금을 내놓고 있는데 특히 영국의 이지젯(EasyJet)이 대표적이다.

a 탈린에서 총각파티를 열어주는 영국 내 전문에이전시의 사이트.

탈린에서 총각파티를 열어주는 영국 내 전문에이전시의 사이트.

작년 5월 탈린 취항을 시작한 이지젯의 런던-탈린 간 왕복항공권 가격은 40유로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5만원 정도. 서울에서 제주도에 갈 정도의 비용으로 왕복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이전의 런던-탈린 간 왕복항공요금의 5분의 1수준이다.

탈린은 저가항공사 취항으로 탈린 관광발전에 장밋빛 미래가 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탈린의 구시가지는 예년보다 눈에 띄게 늘어난 관광객들로 여름 내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저가항공사 취항 이후 과거 북유럽 관광객이 대부분이던 탈린에 서유럽 관광객들이 물밀 듯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저가항공사 취항이 시작된 영국과 스웨덴, 독일의 관광객 수가 두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저가항공사 취항이 가져온 변화는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관광객들이 탈린을 800년 고도라는 이미지보다 '질 좋고 저렴한 놀기 좋은 곳'으로만 인식하게 돼버린 것이다.

결혼 전 총각파티는 '싼' 탈린에서?

특히 그들 중 눈에 많이 띄는 사람들은 결혼식 전 '총각파티'를 벌이기 위해 온 영국인들이다. 해가 지기도 전인 초저녁부터 큰 소리로 떠들며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 차 고도의 밤은 더 이상 고즈넉함을 기대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특히 이들 중 일부는 스포츠경기를 보면서 유리창을 깨기도 해 주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있다.

a 탈린에서 만난 영국인 총각파티의 참가자들, '총각파티는 탈린에서'라는 문구가 등 뒤에 적혀있다.

탈린에서 만난 영국인 총각파티의 참가자들, '총각파티는 탈린에서'라는 문구가 등 뒤에 적혀있다. ⓒ 서진석

총각파티를 위해 9월 중순 탈린을 찾은 매티 코츠(30, 영국인) 일행의 말을 들어보자. 10월 초 결혼 예정인 매티 코츠는 "영국매체들이 내보내는 다양한 정보를 보고 탈린을 목적지로 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가 탈린을 선택한 이유는 영국 사람들에게 파티하기 적당한 곳으로 이곳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일단 모든 것이 싸고, 맥주도 좋고 여자들도 예쁘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나 체코 프라하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어 사람이 너무 많다. 그리고 탈린은 항공권이 특히 싸다."

그들은 저가항공사 대신 에스토니아 국영항공사인 에스토니안 에어(Estonian Air)를 이용했는데 그래봐야 왕복 55파운드, 즉 80유로 (한화 10만원) 밖에 들지 않았다. 또 숙박비나 식음료비도 런던에 비해 30% 가량 저렴하다.

영국인들로 인해 탈린의 밤풍경이 바뀌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매티 코츠는 "현지인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은데 우리가 술을 좀 많이 마시고 시끄럽긴 하지만 친절하다"며 "우린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또 여기에서 우리 돈을 쓰고 있다"고 항변했다. 그는 "세계 어딜 가도 젊은 사람들이 모이고 술을 먹게 되면 소란이 생긴다"며 "누구라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부 초대한다"고 덧붙였다.

탈린에서 매티 코츠와 같은 영국인들의 파티는 금요일 하루에만 6건 정도가 열릴 정도로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서유럽 젊은이들의 총각파티장으로 전락하지 않으면

에스토니아 정부는 아직 이러한 훌리건들의 증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지는 않으나 공항내 국경수비대는 특별경비 강화를 시작한 상태다. 특히 영국인 여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당부하고 있으며, 구시가지 전체에 CCTV를 설치하고 경찰력을 증강하는 등 영국인들이 부리는 난동이나 폭력행위에 대응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탈린 구시가지의 명물인 자전거택시(벨로택시)를 수년간 운전하고 있는 타르마는 "이전보다 구시가지가 소란스러워진 게 사실"이라며 "특히 영국인들이 모여 축구경기를 시청한다거나 모여서 술을 먹는 날이면 바의 유리창을 깨고 소란을 일으키는 일이 잦아 주점 주인과 싸움이 생기는 일이 많다"고 말한다.

a 탈린 구시가자의 명물 벨로택시(자전거 택시). 2~3년 전 이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 해 여름은 올해와 사뭇 달랐다.

탈린 구시가자의 명물 벨로택시(자전거 택시). 2~3년 전 이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 해 여름은 올해와 사뭇 달랐다. ⓒ 서진석

특히 영국인들의 총각파티는 탈린에 매매춘 우려까지 주고 있다. 총각파티를 즐기려는 사람이 탈린으로 몰리게 되면 성매매 관련 업종이 번성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탈린 곳곳에 매매춘업소가 드물지 않게 생겨나고 있어 이러한 우려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탈린에서 우연히 만난 미국인 관광객 조셉 복트(Joseph Vogt)는 탈린이 어떠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탈린을 방문한 것이 4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탈린은 사람이 많이 북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순박하고 고즈넉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었다. 그런데 4년 후 방문한 지금, 탈린이 변화하는 모습에 심히 우려를 느낀다. 곳곳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영국 젊은이들과 그들의 총각파티 자리를 위한 창녀촌과 성매매업소가 여기저기서 성행하고 있다.

4년 전만 해도 나 같은 영어권관광객들을 보게 되면 영어를 한마디라도 더 연습하기 위해서 서로 서로 모여들곤 했는데, 지금은 말을 걸면 자기들에게 추태를 거는 영국인으로 여겨서 슬슬 피하고 있다."


800년 고도 탈린의 구시가지를 서유럽 젊은이들에게 총각파티 장으로 내줄 것인가, 아니면 고도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며 개방물결을 조절해 나갈 것인가. 탈린이 풀어야 할 숙제다.

덧붙이는 글 | 발트3국에 대한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신 분은 서진석 기자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www.freechal.com/BalticKorean

덧붙이는 글 발트3국에 대한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신 분은 서진석 기자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www.freechal.com/Baltic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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