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밭 엉겅퀴꽃이 초대한 손님들

[포토에세이] 월라봉 억새밭에서 만난 나비와 벌

등록 2005.09.27 22:28수정 2005.09.2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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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간에 엉겅퀴는 분노의 가시를 어떻게 자제하고 있을까'라는 어느 시인의 이야기처럼 지난 주말에 별 생각 없이 한번 보고 지나쳤던 가시엉겅퀴가 궁금했다. 제주 월라봉공원 내 오솔길을 따라 20분쯤 걸었을까. 무성한 억새풀 사이로 엉겅퀴꽃이 고개를 내밀었다. 3송이인 줄 알았는데 모두 4송이다. 보라빛 얼굴이 수줍은 동네 처녀 같다.


이 가시엉겅퀴는 한국 특산종으로 제주도와 전라남도 보길도의 산지에 자생하는 희귀식물이다.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로 학계에서는 분류하고 있다. 그만큼 귀한 대접이 필요한 야생화이다.

a 엉겅퀴꽃을 찾아 날아든 표범나비

엉겅퀴꽃을 찾아 날아든 표범나비 ⓒ 김동식


수줍은 보랏빛 동네처녀, 엉겅퀴꽃

엉겅퀴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스코틀랜드와 전쟁하던 바이킹의 한 척후병이 밤을 틈타 적군의 진영에 접근했을 때였다. 몸을 낮춰 다가오던 바이킹 척후병의 팔뚝에 엉겅퀴의 가시가 찔렸다. 척후병은 엉겅퀴의 따끔함에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으며 결국 스코틀랜드 병사에게 발각되어 붙잡히는 신세가 됐다.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려던 바이킹은 보기 좋게 역습을 당해 전쟁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엉겅퀴가 스코틀랜드를 구한 셈이다. 전쟁에 승리한 스코틀랜드는 나라를 구한 엉겅퀴를 나라꽃으로 지정하여 받들어 모셨다 한다.

제주도에서는 가시엉겅퀴를 '소왕이'라고 부른다. 소들이 엉겅퀴 가까이 다가갔다가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고 소왕[牛王]이란 칭호를 붙여 준 것이다. 덩치 값도 못하는 소를 호되게 꾸짖는 익살 섞인 풍자로 받아들여도 좋다. 엉겅퀴의 꽃말이 '근엄'인 것도 동서양마다 이유가 있는 듯하다.

a 군것질을 즐기는 표범나비

군것질을 즐기는 표범나비 ⓒ 김동식


애벌레 시절을 모르는 나비의 군것질



잠시 엉겅퀴를 보고 있는데 철늦은 억새풀 사이로 한 마리 나비가 날아왔다. 생김새를 보니 표범나비였다. 엉겅퀴의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꽃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참 여유롭다. 분명히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을 텐데 무서워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엉겅퀴 줄기가 바람에 심하게 허우적대도 꽃은 나비를 떼어내지 못하고 영락없이 포로가 되었다. 나비는 꽃 속에 머리를 박고 부지런히 꿀을 빨아먹기 시작했다. '풀밭 위의 식사'도 이보다 황홀했을까. 가끔씩 곁눈질하며 사방을 둘러보지만 특별한 자기방어가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a 엉겅퀴의 초대손님이 또 있네요

엉겅퀴의 초대손님이 또 있네요 ⓒ 김동식


그런데 나비는 꿀이나 진물을 빨아먹거나 어떤 경우에는 물을 먹지만 사실은 나비가 된 뒤에는 먹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꿀을 먹는 것은 일종의 군것질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비가 성충이 된 뒤에 워낙 조금밖에 살지 못하는 데다 먹지 않고도 자기의 수명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비는 애벌레 시절에 아주 왕성한 식욕을 발휘한다. 성충이 된 뒤에야 아름다움을 연출하며 꽃가루를 운반해 식물을 번식시키는 역할에 충실하지만.

a 엉겅퀴꽃 속에 파묻힌 배벌

엉겅퀴꽃 속에 파묻힌 배벌 ⓒ 김동식


표범나비와 공생하는 털북숭이 배벌

가을바람에 휘청거리는 엉겅퀴꽃을 자세히 보니 표범나비만 있는 게 아니었다. 꽁무니를 드러낸 또 다른 초대 손님이 꽃 속에 파묻혀 있다. 벌이다. 잠깐씩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날개를 펴면서 몸 전체를 공개하는 순간 그것이 털북숭이 배벌이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a 먹는 것에만 정신 팔렸어요

먹는 것에만 정신 팔렸어요 ⓒ 김동식


금속광택을 띠는 배벌의 특징은 털이 많고 배가 크고 길다는 것. 보르네오섬에는 몸길이가 6㎝에 이르는 대형 배벌이 있다고 한다. 직접 보고 싶은데 막상 눈앞에 나타나면 줄행랑을 치고 싶을 만큼 소름이 끼친다.

a 꽃 전체를 누비고 다니는 배벌

꽃 전체를 누비고 다니는 배벌 ⓒ 김동식


꽤 큰 키를 자랑하는 배벌은 꿀을 빨아먹는데도 참 열심이다. 식사를 위해서라면 온몸에 꽃가루가 묻어 망가져도 괜찮은 모양이다. 이 녀석은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너무 먹기에만 급급해 있다.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한참을 동안 지켜보는 인간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하다. 벌과의 교감은 틀린 것 같다.

a 배벌의 특징은 털이 많고 몸이 길며 배가 크다는 것

배벌의 특징은 털이 많고 몸이 길며 배가 크다는 것 ⓒ 김동식


군것질을 끝낸 표범나비가 떠난 자리에는 아직도 배벌이 남아 있다. 식성도 대단하다. 이제는 엉겅퀴가 걱정이다. 저렇게 나비와 벌이 할퀴고 가버리면 기력을 잃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분노의 가시를 꼿꼿이 뻗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식물과 곤충들의 공존방식일지도 모른다.

다시 일터로 돌아갈 시간이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좀더 고민해 보아야겠다.
첨부파일
rufdml_250363_1[1].wmv

덧붙이는 글 | 제주도 서귀포시 신효마을에 있는 월라봉공원 산기슭에서 관찰했다.

덧붙이는 글 제주도 서귀포시 신효마을에 있는 월라봉공원 산기슭에서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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