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드라, 이제 세상에 그는 없다

젊은 망부 캄보디아인 찬드라를 추모하며

등록 2005.09.29 18:58수정 2005.09.3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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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상복을 입고 배가 남산만한 젊은 부인이 절규한다. 조문객으로 온 이들 역시 영정 속의 남자와 그 앞의 부인을 보면서 연신 흐느낀다. 영정 속의 남자는 너무 젊다. 혹 사진이 바뀐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젊은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는 부인의 머릿속은 하얗다. '지금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 슬프다. 아니, 죽고 싶을 만큼 외롭다.'

젊은 부인의 슬픔을 더해주는 것은 검은 상복 속에 가려진 태아의 규칙적인 '태동'이다.

'탁, 탁, 탁.'

아무 것도 모르는 태아가 힘찬 발길질을 할 때마다 상복 입은 부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다.

'세상에,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이런 일이….'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아니다. '실제 상황'이다. 이런 끔찍한 장면이 실제 벌어진 '현재'가 나는 싫다.

며칠 전, 전자우편을 받았다. 편지를 보내온 사람은 지난해 여름, 우리 대학으로 연수를 왔던 캄보디아 교수들 가운데 홍일점이었던 '니일리'였다. 편지의 제목은 이 가을에 조금은 쓸쓸한 느낌이 드는 '옛날 학생으로부터 (From ex-student)'였다.


반가운 마음에 급히 편지를 클릭했는데 아뿔사, 너무나 슬픈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의 시작은 선생님의 어설픈 한국어 발음인 '신생님께 Dear Sinsengnim!'였다.

반가운 니일리의 메일
반가운 니일리의 메일한나영
선생님, 니일리예요. 그동안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못해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저를 기억하고 계시면 좋겠는데…. 선생님, 저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잘 지내고 있어요. 선생님은 어떠세요?

저, 오늘은 선생님께 나쁜 소식을 전해드리려고 해요. 스베이 찬드라를 기억하시죠? 아마 선생님께서도 찬드라의 사진을 갖고 계실 거예요. 그런데... 그가 한 달 전에 죽었어요. 바로 8월 26일에요. 고혈압 때문에요.

그의 아내는 지난 8월 31일에 찬드라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아이를 출산했어요. 정말 슬픈 소식이에요. 이제 그 아들은 21일밖에 안 되었어요. 저는 지난 주말에 그의 집에 다녀왔어요. 아들의 이름은 스베이 판하리스예요. 선생님께 이제야 알려드리게 되어 죄송해요.

니일리로부터


가족도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먼 나라 이방인의 소식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찬드라가 누구였던가.

찬드라가 잡지를 오려서 만든 자기 소개서
찬드라가 잡지를 오려서 만든 자기 소개서한나영
지난 해 7월, 캄보디아에서 온 교수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이곳에 썼던 기사 '가나다라... 잠도 안자고 공부해요'의 주인공이 바로 찬드라였다.

찬드라는 바로 그 열두 명의 학생 가운데 가장 진지한 학구파로 열심히 공부했던 학생이었다. 질문도 가장 많았고, 한국어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던 그였다. 또한 그는 갓 결혼해서 온 '새 신랑'으로 아내에게 줄 선물을 내게도 의논했던 자상한 남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그만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사실 죽음이라는 길은 모두가 예외 없이 떠나야 할 인생의 여정이긴 하다. 하지만 그 길을 너무나 일찍 떠나 버린 젊은 찬드라. 나는 그를 추억하며 니일리에게 가슴 아픈 답장을 보냈다.

니일리에게

잘 지냈어요? 아직도 니일리를 기억하고 있냐고 내게 물었지요.

"오, 노!" 내가 어떻게 니일리를 잊겠어요? 못 잊어요! 니일리는 정말 예쁘고 영리한 아가씨였어요. 영어와 불어에 능통한 재원답게 한국어도 아주 잘 했고 무엇보다도 기품이 있었어요. 지금 그곳에서는 뭘 가르치고 있나요? 한국말은 잊어 버리지 않았어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요.

그런데 니일리, 어떻게 그런 나쁜 소식이 일어난 거죠? 믿을 수 없어요. 찬드라는 아직 젊고 열정적인 학생이었는데 왜 그런 일이…. 사랑하는 아내와 태중의 아이를 두고 어떻게 떠났다는 말예요? 정말 믿을 수 없어요.

니일리, 울고 싶어요. 내가 만약 그곳에 있었다면 찬드라의 집을 방문해서 그의 가족을 위로하고 싶어요. 정말 할 말이 없어요. 너무 슬퍼서….

니일리, 앞으로도 계속 연락을 해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세요. 보고 싶어요. 언제 다시 만나요. 캄보디아든 한국이든 다시 만나길 원해요. 잘 지내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한 계절을 같이 보냈던 제자의 소식은 분명 반가움 이상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공식적인 나의 첫 외국인 제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랬던 만큼 반가움은 더욱 컸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렸던 소식이 그만 '부음'으로 오고 말다니…. 뭐라 할 말을 잊었다. 삶이 덧없이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찬드라, 젊은 아내와 유복자를 두고 떠나게 되어 당신도 눈을 못 감았겠지요. 그렇지만 이제 눈물과 한숨이 없는 그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길 바래요. 진정으로 당신을 추모합니다. 평안히 잠들길…."

캄보디아 제자들과 함께 했던 지난해 여름
캄보디아 제자들과 함께 했던 지난해 여름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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