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보수' 명문종가 사람들 이야기

전통문화 지킴이 이연자가 전해주는 <명문종가 사람들>

등록 2005.10.05 13:05수정 2005.10.0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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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은 보수적, 낡은 것으로 취급받는 이 시대, 그러나 과연 그런 멍에를 씌울 만큼 우리의 전통문화가 그러한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전통문화의 복원이 일제 시대를 지나 70,80년대를 넘어 다시금 부활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질긴 악연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 사실.

하지만 아름다운 보수라는 말이 있듯이 전통은 전통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며 현재 우리들이 있게 하는 원동력이자 근원이다. 그 근원을 무시한 채 우리는 현대 속도에 빠르게 맞추어 가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전통을 등한시하고 있다. 이젠 그런 무지를 타파할 때가 아닌가.


이쯤에서 소개할 책을 이야기해보자. 명가의 정신을 이어가는 19곳 종가 탐방기를 묶은 책이 출간되었다. 랜덤하우스 중앙이 펴내고 저자 이연자씨가 집필한 <명문종가 사람들>이다. 으레 명문종가 하면 고지식하고, 답답한 가부장적인 전통가정을 생각하기 마련.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본다면 그들의 정신은 한 가정을 이루는 근본인 동시에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바탕이다. 더 나아가 이들은 우리가 매도했던 전통의 근본을 이어갈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6년 동안 발품을 팔아 전국 곳곳을 누비며 지금까지 무려 73곳의 종가를 집접 방문하고 취재하여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17개월 동안 탑방한 19곳의 종가를 정리했다. <명문 종가> 탐방은 이미 3권의 책으로 출간되었으며 <명문종가 사람들>은 네 번째 저서다. 이 책에서는 명문 종가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명문종가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정신과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종갓집 문턱을 넘으면서 숙연해진 것은 여전히 고택의 고색창연한 기왓장 때문이 아니었다. 고택도 사라지고 소박한 흔적만 남은 종가를 지키고 있는 종손의 풍모와 종부의 강인함에서 역사와 세월을 아우르는 꼿꼿한 자존심을 느꼈을 때, 족보가 아니라 조상의 기개를 자랑스러이 간직한 이들만의 자긍심을 만났을 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명문 종가'란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덩그러니 건물만 남은 문화재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선인들의 숭고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현대인들의 지킴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저자의 말처럼 이 책에는 그들의 삶이 진솔하게 베어있다. 그럼 이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저자는 이 책에서 고택의 문화재 이야기를 시작으로 종가의 내림음식과 차, 복식 등 생활문화를 섬세하게 묘사하였고, 전통적인 관혼상제의 예법을 상세히 살펴보면서 특히 성년식이라 할 '관례'를 취재해 담았다. 한 편의 기행문처럼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의 전통 생활 문화 전반을 배울 수 있다.

선비정신으로 고택을 계승하고 있다


제 1부 '명문의 정신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유명한 역사인물들의 일화를 소개하며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어진 종손들이 종가를 이어가는 철학을 담고 있다. 이는 선비정신으로 이어지면서 그들 삶의 확고한 신념이 되고 있다.

책에서 황희 정승의 청백사상을 가풍으로 여기며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하여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검소하면서 꼿꼿하게 종가를 지키는 손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또 홀로 종가를 지키다 54년 만에 금강산에서 종손 남편을 만난 이산가족 종부, 아기 종손을 두 살 때 잃고 남편 없는 종가의 지킴이가 되었던 노종부, 오리 정승의 370년 전 유언을 새기며 가족 납골묘를 만들고, 종가를 박물관으로 꾸민 이원익 종가 등에서 우리는 옛 선비들의 꼿꼿한 정신을 다시금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의 정신에서 우리 옛 조상들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이 지닌 매력이다.

그들의 선비정신이 아직도 살아있기에 고택을 소중하게 여기며 하나의 문화재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고택은 그야말로 하나의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채 대청마루의 대락에 애지중지 모셔두었던 유물 1만 점을 소수 박물관에 기증한 연안 김씨 마취당과 괴헌 종가. 수많은 변란 속에서도 애지중지 지녀온 종가의 유물 122점이 보물로 지정된 고창 오씨 죽유 종가.

문자가 노종부와 그 아들 종손이 무릎 끓고 술, 담배를 멀리하여 지켜온 참뜻을 보면서 그들이 고택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선비정신'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그들이 현존하기에 단지 전통은 문화재가 아니라 현재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현실이 된다.

종부들의 삶과 관혼상제의 참뜻

흔히 전통 사회의 여성과 관혼상제 이야기를 들으며 여성학자들은 반기를 들며 싸움을 하려 들고, 젊은이들은 고리타분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그것을 꼭 이성적으로 따지고 들어야 하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각자 그들의 관점과 가치관이 있다. 만약 전통적인 여성의 삶을 원했고, 택했으며 그 당시의 가치가 그러했더라면 그것은 인정해줘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그럼 제3부'종가의 맛, 종부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이 책에서는 종가마다 전해오는 음식문화와 종부들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대대로 이어져 오는 그들의 음식 맛과 요즘을 사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더 나아가 목마른 길손에게 갈증을 풀어주고, 배고픈 이웃에겐 든든히 밥 먹이는 일을 낙으로 여겼던 종부들의 덕행을 알 수 있다.

350년 전 <음식디미방>을 쓴 안동 장씨 부인의 난면 맛이 일품인 안동 장씨 경당 장흥 종가, 창년 조씨 명숙공 종가의 맛깔스러운 내림음식과 설맞이 음식 등 종부의 정갈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이어 제4부'관혼상제에 살아 있는 우리 예절의 참뜻'에서는 우리 선인들이 지내던 통과의례가 묘사되어 있다. <예가>의 혼례풍습에 따라 사당폐백을 드리는 청주 한씨 서평부원군 한준검 종가, 향약의 본향답게 양로소를 운영하며 어른들을 공경하는 성산 여씨 원정공 종가도 현대인들이 따라해 볼 만한 풍습을 가르쳐준다.

의성 김씨 청계공 종가에서 취재한 관례는 떠들썩한 서양식 성년식에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요즘 그들에게 권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눈길을 끈다.

으레 성년이 되면 자유와 방종의 경계가 애매모호해 여러 성년식을 치른 아이들이 자칫 권리만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고 싶다.

종가의 살아있음이 미래로 이어지다

제5부는 '다시 태어나는 명문 종가'로 종가의 미래상을 담았다. 종손이 종가를 떠나 빈집이 많은 요즈음, 가정 교육과 청소년 예절 교육의 산실로 새롭게 태어나 전통과 현대가 이어지는 아름다운 변화로 그려지고 있음과 동시에 여전히 그들이 현실에 살아있기에 미래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춘향전>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계서 성이성 종가의 특이한 내력도 언제든 길손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또 전주 이씨 겸산 이국손 종가의 100여년 된 대안학교 덕림정사는 '가정 교육의 집'으로 선정되어 새로운 청소년 체험학교로 탈바꿈했다. 이런 모습은 종가의 밝은 미래를 말해주고 있다.

이 책은 우리 민족 고유의 삶과 의례가 구태의연한 것이 아닌 검소하면서도 절제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 정신을 배우길 바라는 듯 책 내용은 그들의 마음만큼이나 간결하면서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독자를 배려하고 있다.

명문종가 사람들 - 명가의 정신을 이어가는 19곳 종가 탐방기

이연자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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