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애달퍼라, 신음하는 여러해살이풀"

[포토에세이] 제주 비자림로 삼나무숲에서 만난 양하꽃

등록 2005.10.10 18:21수정 2005.10.1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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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비자림로는 억새꽃과 삼나무 숲길로 이름값을 하는 곳이다. 2002년에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되어 대통령상까지 받은 산간도로이다. 이 도로는 북제주군 구좌읍 평대리에서 비자림, 교래리를 거쳐 한라산 5·16도로(제주시 봉개동)까지 이어진다. 버드나무처럼 휘어진 고갯길이 정취가 있다. 삼나무 숲길은 5.16도로(국도 11호선)와 붙어 있다.


그 아름다운 도로에는 가을여행을 즐기는 연인과 친구들끼리 추억만들기에 한창이다. 뱃속까지 파고드는 공기가 상쾌하다. 따로 삼림욕이 필요 없다.

여러 날을 벼르던 숲으로 드디어 들어가게 되었다. 아내의 유쾌지수가 높아야 가끔씩 밥상 위에 오르던 꽃양하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이 곳에 양하(襄河)가 떼지어 살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몇 해 전에 들어 알고 있다. 10월에 피는 꽃양하는 수줍은 누이처럼 곱다.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까.

삼나무 숲 속은 바깥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시끄럽다. 산비둘기가 퍼드득 날자 노루가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다. 까마귀가 울고, 가까운 숲 속에서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목청 큰 노루가 고함치는 소리다. 순박한 외모와는 달리 노루의 목청소리는 기분 나쁠 정도로 충격적이다.

a 삼나무숲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삼나무숲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 김동식


수줍은 누이 '꽃양하'를 찾아 가보니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양하가 무리지어 살고 있는 곳에서 벌어졌다.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사지가 굳어져 버렸다. 현장은 말이 아니었다. 짓밟고 넘어뜨리고 폭격 맞은 양하풀은 거의 전부 쓰러져 있었다. 아!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도 이처럼 끔찍했을까. 저주받은 모습으로 양하는 울고 있었다.


a 부끄럽다! 짓밟고, 쓰러뜨리고

부끄럽다! 짓밟고, 쓰러뜨리고 ⓒ 김동식

아름드리 삼나무는 여러 토막으로 잘린 채 흩어져 있다. 나뒹굴고 있는 곳마다 양하가 깔려 있다. 나무토막을 피한 양하도 함께 넘어져 신음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숲을 공격한 인간의 발길질에 별 저항없이 당한 것이다.

속상하다. 욕망의 끝자락에는 항상 슬픔이 묻어 있는 것을 본다. 자연을 벗삼아 그의 속살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자연과 멀어져 그의 여린 가슴을 짓밟는 사람에게도 욕망의 그루터기는 같다. 부끄럽다. 원죄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면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a 삼나무에 깔려 신음하고 있는 양하

삼나무에 깔려 신음하고 있는 양하 ⓒ 김동식

고맙게도 몇 그루는 쓰러지지 않았다. 무너져버린 동족을 내려다보며 실낱같은 희망으로 서 있다. 쓰러진 삼나무 옆에 바짝 붙어 있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사람의 발길이 지나갔을 것이다. 천만다행이다. '여러해살이풀'답게 장수하기를 빌어주어야 할 것 같다.

a 쓰러지지 않았구나, 희망처럼 버티고 있구나.

쓰러지지 않았구나, 희망처럼 버티고 있구나. ⓒ 김동식


살아있구나, 담황색 꽃을 피운 꽃양하

이제 꽃양하를 찾아 나설 차례이다. 자포자기하고도 싶었지만 그래도 전쟁터에서 살아 있을 희망꽃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쓰러져 있는 양하를 하나씩 들춰내며 탐색전에 들어갔다. 쉽사리 꽃줄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인내가 필요한 순간이다. 어린시절 소풍갔을 때 보물찾던 설렘으로 한참을 뒤졌다.

a 전장에 핀 꽃, 그 이름 꽃양하

전장에 핀 꽃, 그 이름 꽃양하 ⓒ 김동식

양하를 짓누르고 있는 삼나무 잔가지를 들어내는 순간 한계절을 숨어살던 꽃양하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 있다" 전쟁터에 핀 꽃이 이렇게 거룩할까. 가슴 속까지 반가움이 밀려온다. 맨살을 드러내고 숨죽인 표정이 밉지가 않다.

a 다시 희망의 이름으로

다시 희망의 이름으로 ⓒ 김동식

쑥대밭이 되었지만 양하의 땅속줄기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증거이리라. 양하는 목숨에 대한 끈질긴 생명력이 있다. 그 마디 부분에서 나온 꽃줄기가 흙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온 지도 족히 한 달은 넘은 것 같다. 꽃턱잎은 홍갈색이고 꽃턱잎 사이에서 담황색의 꽃이 곱게 피었다.

a 담황색 꽃이 아름다운 꽃양하

담황색 꽃이 아름다운 꽃양하 ⓒ 김동식

햇빛을 받지 못하여 표정이 창백하다. 며칠 전 내렸던 빗물이 아직도 꽃이삭에 묻어 있다. 안쓰럽게 보였다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사람의 발자국을 피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견스럽기만 하다. 꽃양하는 몇 곳에서 더 발견되었다.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때론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a 수줍은 누이처럼 곱구나

수줍은 누이처럼 곱구나 ⓒ 김동식

입맛을 돋우던 별미, 한방의 약재로도 '제몫'

양하는 생강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아열대지방에서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쪽이 고향이다. 한방에서는 뿌리줄기와 종자를 약재로 쓴다고 한다. 그 옛날 시골집에서는 담벼락이나 처마밑, 텃밭의 박토(薄土)에 심어 농가의 훌륭한 반찬으로 대접을 받았다. 어김없이 명절이나 제삿상에도 빠지지 않는 나물이었다.

a 그 옛날 시골집의 사랑

그 옛날 시골집의 사랑 ⓒ 김동식

그 시절 어머니들은 꽃양하(꽃줄기)를 이용하여 먹을거리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제주도에서는 '양애간' 또는 '양애끈'이라고 불렀다. 할머니의 손길에 의해 곱게 다듬어진 꽃양하는 어머니의 조리를 거쳐 밥상에 올라가는 순간 김치보다 먼저 손이 갈 정도다. 입맛을 잃기 쉬운 여름철에는 사라진 입맛을 돋우는 별미로 통하기도 한다. 향이 독특하고 그윽하여 육고기나 생선, 채소 등과 함께 조리하더라도 맛깔이 있다. 조리없이 된장 찍어 먹어도 맛이 제법이다.

a 끈끈한 생명력으로 우리 언제 다시 만나자.

끈끈한 생명력으로 우리 언제 다시 만나자. ⓒ 김동식

지금도 상큼하고 톡 쏘는 양하의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가끔씩 오일장에 가서 추억의 뒤안길로 밀려나는 꽃양하를 사다 먹기도 한다.

쓰러진 양하를 일으켜 세워도 다시 쓰러진다. 꺾인 허리를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땅속줄기에 희망을 거는 것 같다. 용서하여라. 여기 저기 희망의 불씨를 키우는 꽃양하가 살아 있지 않는가. 자신의 속살이 드러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궁색한 변명이 오늘, 왜 이렇게 가슴 아픈가. 숲에서 빠져 나오니 푸른 하늘이 열렸다.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깥세상은 눈치를 못 챈 듯하다. 가을의 해 그림자가 나의 부끄러움을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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