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다이닝 키친'과 까치구멍집

[고부의 오지 여행4] 운서산 장육사와 화수루, 까치구멍집

등록 2005.10.12 14:54수정 2005.10.1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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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빈곤은 상상력의 빈곤을 가져오고...

'LPG통은 바람이 잘 통하는 옥외에 둔다.'


70년대 중반 중학교에 들어가 가정 시간에 배웠던,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하고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아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문장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하고 난방도 했던 시절, 한번도 본 적이 없는 LPG통과 가스레인지라는 단어는 영어 문장보다, 수학 풀이보다 더 난해한 문장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부엌과 거실을 한 공간에 둔다는 '리빙 다이닝 키친'이라는 공간 개념 또한 알쏭달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밥 먹는 안방과 흙바닥에 시커멓게 그을려 천정이 내려앉을 것 같은 부엌이 한 공간에 있을 수 있는가. 이건 가스레인지의 통을 어디에 두는가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낑낑거리며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이해하려고 애쓰던 딸을 보다 못한 아버지가 말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함경도나 평안도처럼 추운 지방에서는 부엌과 안방이 한 공간에 있었단다"라고….

격세지감을 느끼지만 이젠 화장실까지 한 공간에 있는 집에서 살고 있다. 안방 옆에, 식탁 옆에 화장실이 콕 붙어 있어 식탁에서 밥 먹다 보면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도 들리고 가끔씩 냄새도 풍긴다. 볼일보고 재 한바가지 끼어 얹거나, 거적문 사이로 바라보던 시린 겨울 밤하늘의 별은 이제 전설이 된 지 오래다.

그때 이해되지 않았던 문장, 한 공간 안에 안방과 부엌이 함께 있는 까치구멍집을 확인하러 나선 길이었다.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어떻게 길을 잡아도 서울에서 환한 하루가 소요될 만큼 먼 곳이다. 어린 시절 내 상상의 한계를 실감하게 했던 까치구멍집을 찾아가는 길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길만큼이나 멀고 험했다.

a 'ㅁ"자의  안동 권씨 재사 화수루 입구와 내부

'ㅁ"자의 안동 권씨 재사 화수루 입구와 내부 ⓒ 이승열


a 화수루. 까치구멍집이 납작 엎드려 주인을 시중하듯 다소곳하게 서 있다.

화수루. 까치구멍집이 납작 엎드려 주인을 시중하듯 다소곳하게 서 있다. ⓒ 이승열


영해에서 영양방향으로 이정표 하나 변변치 않은 920번 지방도로에 접어들면 간간이 집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고, 민가가 나타날 때마다 몇 번이고 차를 세워 길을 물어야 하는 곳, 그 길 끝에 안동 권씨 문중의 재사 건물인 화수루와 그 옆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납작 엎드린 고지기 살림집 까치구멍집이 있다.


재사란 문중의 일을 논하거나 문중의 자제들이 학업을 위해 머물기 위해 지은 집이다. 학문과 수양을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으니 번잡한 곳이 아니라 조용한 곳에 자리 잡는 것은 필수다. 재사를 운영할 수 있는 가문의 재력, 명망 한 가지라도 빠지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세워진 2층 누각 화수루는 비운의 어린 왕 단종의 외삼촌이었던 권자신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화를 당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의 어린 아들 권책이 유배되어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 권책의 증손이 일가를 이루며 살았던 곳에 화수루와 까치구멍집이 남아 있다.


언뜻 화수루를 대하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찍은 안동 봉정사의 영산암이 연상된다. 이층 누각의 'ㅁ'자 건물은 보통 다른 지방의 누각과 달리 이층 전체를 널빤지 막아 열 손실을 최소화시켰다. 보통 눈이 많고 추위가 심한 지방에서 나타나는 건물의 일반적인 특성이라 한다.

a 까치구멍의 외부와 내부

까치구멍의 외부와 내부 ⓒ 이승열


a 화수루 옆 까치 구멍집 전경. 용마루 양쪽 까치구멍 부분이 불룩하다.

화수루 옆 까치 구멍집 전경. 용마루 양쪽 까치구멍 부분이 불룩하다. ⓒ 이승열


a 까치구멍집 내부. 외양간과 왼쪽에 부엌, 안방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

까치구멍집 내부. 외양간과 왼쪽에 부엌, 안방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 ⓒ 이승열


재사의 일을 보살피기 위한 고지기의 살림집, 까치 구멍집이 화수루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다. 처음부터 내 관심과 눈길을 끈 것은 까치구멍집이었다.

그 더럽고 냄새나는 외양간과 부엌, 안방이 한 공간 안에 존재하며 천연의 조명시설인 까치구멍까지 갖춘 내 상상력 밖의 공간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까치구멍은 용마루 양쪽 끝에 구멍을 내어 그 구멍을 통해 외부의 빛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천연의 조명시설이자, 내부의 연기를 밖으로 빼내는 굴뚝의 역할까지 함께 하고 있었다.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동쪽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한다.

가을, 누렇게 단풍든 짚으로 새로 해 이은 지붕의 까치지붕집이 옛 주인들 시중들 듯 서 있었다. 형태는 유지했으되 사람이 살지 않아 내부가 지저분하고 많이 파괴되었음이 안타까웠다. 열 손실을 최소화하며 긴 겨울을 지냈을 민초들의 삶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건물의 형태이다. 이제야 비로소 한 공간에 존재하는 안방, 부엌, 외양간의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 산길이 끝나는 곳, 운서산 장육사

화수루에서 5분쯤 더 달리다가 다리 건너 막다른 끝 산기슭에 도착하면 장육사가 있다. 운서산 장육사는 무학대사의 스승이자 이곳 창수면에서 태어난 나옹 선사가 고려 말 공민왕 때 창건한 고찰이다. 이천의 영월암, 여주의 신륵사, 서산의 간월암 등 전국 방방곡곡에 절을 지은 고려 왕사 나옹 선사건만 어딜 보아도 스님의 탄생지였다는 사실은 알 길이 없다.

a 건칠보살상. 화려한 금박을 하고 있어 옻칠을 했던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건칠보살상. 화려한 금박을 하고 있어 옻칠을 했던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 이승열


a 운서산 장육사 홍련암. 대웅전 뒷편 장육사가 조망되는 곳에 있다.

운서산 장육사 홍련암. 대웅전 뒷편 장육사가 조망되는 곳에 있다. ⓒ 이승열


장육사를 찾아 들어가는 길목에 나옹 선사의 전설이 깃든 '반송 쉼터'에 스님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나옹이 출가할 때 지팡이를 바위 위에 거꾸로 꽂으며 '이 지팡이가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고 유언을 남겼다 한다. 지팡이가 자라 반송이 되어 700여 년 동안 거목이 되었는데 1965년쯤 고사했다고 전해진다. 아직도 부석사 조사당 앞에는 의상스님의 지팡이가 살아 꽃을 피우고 옛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데….

장육사에는 임진왜란 전 중창불사에 참여한 한 목수의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어머니의 쾌유를 빌며 시주금을 내고 싶었지만 형편이 좋지 않았던 목수는 자신의 기술로 중창불사에 힘을 보태고자 했다. 그런데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들은 목수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다고 생각하고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다른 목수가 공사를 마무리하였으나 기술 부족으로 대웅전은 뱃머리집이 되었다고 한다. 나옹 선사의 자취만큼이나 그 뱃머리집 또한 찾아 볼 수가 없이 한적한 곳에 있다는 것을 빼 놓고는 별 특색 없는 전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나라 방방곡곡을 휩쓸고 있는 중창불사가 오지인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a 운서산 장육사 대웅전. 고려의 왕사 나옹선사의 태생지가 근처라 한다.

운서산 장육사 대웅전. 고려의 왕사 나옹선사의 태생지가 근처라 한다. ⓒ 이승열


a 대웅전 내부의 천정 불화들.

대웅전 내부의 천정 불화들. ⓒ 이승열


장육사를 빛내는 보물은 대웅전에 모셔진 보물 1933호인 조선 초기 건칠보살좌상이다.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속을 빼낸 다음 그 위에 종이를 덧대어 만든 불상을 말한다. 유리벽 안에 모셔진 세 불보살들에게 내 소망을 잠시 빌어본다. 필요할 때만 머리 조아리며 소원을 비는 불심 없는 여행객을 건칠보살님은 과연 굽어 살피실까? 산 넘고 물 건너 이 오지까지 찾아온 여행객을 혹 어여삐 여기지 여겨 가피를 내리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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