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서 삶의 힘을 충전했다

마음이 심란하고 삶이 힘들 때,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을 찾아가 보자

등록 2005.10.13 17:18수정 2005.10.1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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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심란하고 삶에 힘을 충전하고 싶을 때면 시장에 들러 보라고 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어서다. 그런데 나는 오늘 또 다른 방법 하나를 찾았다.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을 찾아가 보는 것이다.

가을 하늘에서 곧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오후, 추억 찾기 축제가 있어 그 곳에 가기로 했다. 그 축제는 '추억의 7080 광주충장로축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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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모

단풍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 금남로 도로에 추억을 담은 행렬들이 지나 갔다. 그 중에 내 눈 안에 크게 들어 온 행렬이 있었다. 긴 머리에 교복과 교련복을 입고 지나가는 행렬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벗고 싶었던 교복이었고 교련복이었는데 순간, 가슴 뭉클하고 코끝이 찡했다. 고교 시절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반가웠다.

분장 행렬이 다 끝나기 전에 나는 어디론가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추억 전시관'이었다. 전시관 앞에서는 막 국기 하강식이 끝났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오후 4시 아니면 5시 정각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하던 일을 멈추고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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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모

전시장 입구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처럼 추억을 더듬고 잠시나마 그 속에 있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골동품 가게에나 있을 만한 책걸상이 있었다. 의자에 잠시 앉았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생각을 많이 했던 그 의자에 어른, 아니 중년이 되어 앉았다. 그런데 딱딱하고 좁게만 느껴져야 할 의자인데도 앉아 있는 동안 참 편했다.

연탄 가게, 재래식 화장실, 만화 가게, 양은 도시락, 종이 딱지, 스카이콩콩, 음악다방 DJ박스, 담배 갑과 성냥갑의 변천 과정,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는 빛바랜 포스터까지 추억에 잠기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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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모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충장로 거리를 걷는데 금남로 도청 앞 광장에서 추억의 7080 콘서트가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서둘러 무대가 있는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지방 방송국에서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콘서트였다. 첫 출연자는 '그대 그리고 나'로 많이 알려진 '소리새' 였다.

'낙엽 떨어진 그 길을 정답게 걸었던 그대 그리고 나
때론 슬픔에 잠겨서 한없이 울었던 그대 그리고 나'


추억 속으로 여행은 시작되었다. 해와 달의 '축복'에 이어 가을이면 한번은 흥얼거려 보는 신계행의 '가을 사랑', 충장로와 금남로에 얽힌 사연들을 생각해 보게 하는 장은아의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등의 노래와 함께 가을 밤 7080들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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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모

호소력 짙은, 이 계절에 더욱 어울리는 애절한 목소리 가수 임지훈의 '사랑의 썰물'과 '회상'은 추억 속에 푹 빠져들게 했고 이영복이 '쥴리아' '어린 시절'을 부를 때는 모두 박수치며 하나가 되었다.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합창하며 공연은 끝났다. 공연이 끝났지만 추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관객들이 한동안 일어서지 않았다.

최루탄과 화염병 대신 꽃가루와 축포의 연기가 자욱한 전남도청 앞 특설무대 공연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가슴 아프고 가슴을 찢었던 울분의 함성과 고통 대신 오늘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편한 가을 밤, 행복과 사랑이 가득한 밤이었다.

아내의 손을 처음 잡고 걸었던 충장로도 걸었다. 그리고 1986년 처음 사업을 시작했던 건물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변한 것들도 많았지만 그렇게 낯설지가 않았다.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그러나 그 추억을 꺼내어 닦아보면 그 옛날을 볼 수도 있고 편안해진다. 거기서 숨가쁘게 달려 온 지친 마음도 추슬러 볼 수 있다.

4시간의 외출이었지만 어렸을 적에 시장에서 돌아오시는 어머니의 시장 보따리처럼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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