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붉은 악마, 효순, 미선 사건때 촛불, 그리고 2002대선의 노사모 등, 이 세가지 큰 사건을 관통하는 것은 시민들의 자발성과 인터넷이었다”라며 2000년 이후 시민운동의 특성을 강조하는 하승창 처장허미옥
2002년, 출근길 지하철에서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는 당시 노무현 후보의 선거유인물을 출근길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야, 오랜만이다. 너 선거운동하니?"
"응, 이 유인물만 돌리고 얼른 출근할 거야."
지난 14일, 대구지역 시민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강좌에서 '시민운동의 과거, 현재, 미래'를 주제로 강의를 하기 위해 강단에 선 하승창 함께하는 시민행동 사무처장(이하 하 처장)이 한 이야기다.
하 처장은 "90년대 시민운동의 정점이 2000년 총선연대였다면, 90년대 시민운동의 변곡점은 2002년"이라며 "월드컵의 붉은 악마, 효순, 미선 사건 때 촛불, 그리고 2002대선의 노사모 등, 이 3가지 큰 사건을 관통하는 것은 시민들의 자발성과 인터넷이었다"고 밝혔다.
강의 초반, 90년 경실련이 중심이 된 시민운동의 역사를 설명할 때나, 97년 한겨레신문에서 가장 먼저 언급했던 '시민 없는 시민운동'을 거론할 때, 시민운동의 관성화를 비판할 때까지만 해도 강의실은 고요했지만, 2002년 사례들이 소개되자 갑자기 수강생들이 술렁였다.
또한 2002년 당시 출근길에 오랜만에 만났던 고등학교 친구에 대한 사례가 소개되자 수강생인 대구지역 시민단체 활동가들 또한 두런두런 자기의 경험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 있었지, 촛불은, 노사모, 대~한민국, 축구' 등 다양한 단어들이 쏟아졌다.
2002년 이후 시민운동의 가치 지향 변화
하 처장은 "97년 속칭 '경실련 김현철 비디오테이프 사건'이후로 시민운동 내에 잠재되었던 다양한 문제들이 외부로 표출되기 시작했다"며 "시민운동의 관료화, 언론플레이 중심의 운동, 한겨레신문에서 가장 먼저 지적한 '시민 없는 시민운동' 등이 주요이슈"라고 지적했다.
또한 90년대까지 언론은 'NGO 코너'들로 많은 지면을 시민운동에 할애했지만, 2000년 이후부터 조중동 등 주요 언론들은 이에 대한 노출빈도를 줄이고, 시민운동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2000년과 2002년이 90년대 시민운동의 정체를 극복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하 처장은 "2000년 이전의 시민운동의 가치는 효율성, 투명성, 형평성 등이지만, 인터넷의 발달과 시민들의 자발성은 이와 같은 가치를 생태, 평화, 인권, 공동체 등 으로 변화시켰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시민들의 자발성과 인터넷, 지역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