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웠던 여름, 금지된 사랑의 아픔

[포토에세이] 다람아, 부디 위스콘신의 겨울을 잘 견디렴

등록 2005.10.18 08:36수정 2005.10.1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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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규

지난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열기를 뿜어내던 잿빛 아스팔트는 이제 갖가지 색의 잎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높은 이상의 가지에서 내려와 바닥을 쓰는 낙엽은 지나가 버린 열정의 흔적이자,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의 아픈 반추이다.


나는 몇 번인가 그녀가 베란다 창 앞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는 듯, 조용한 갈망으로 가득찬 눈은 이슬에 젖은 머루처럼 검게 빛났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놀란 듯 수줍은 듯 서둘러 몸을 감추었다.

그러기를 몇 번, 이제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나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그녀는 내가 두 손 가득 담아 내미는 선물을 몇 번이나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호의의 징표를 한사코 거부했지만, 나는 선물을 베란다 모퉁이에 놓아 두곤 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면 그 선물은 수줍은 그녀의 모습처럼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기를 몇 주, 그녀는 이제 제법 당당하게 고개를 창문 안으로 들이밀기도 했으며, 선물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닫힌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기도 했다.

우리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제 그녀는 내가 조심스럽게 꺼내는 카메라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람이"라는 예쁜 한국 이름도 얻었다. 그러나 사랑이 커 가면 걱정도 느는 법.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늘고, 그녀를 생각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마음 한 구석에서 번져오는 염려의 그림자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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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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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규

다람이가 집앞의 도로를 잘 건너다닐까. 혹시 쉽게 얻을 수 있는 음식 때문에 자연적응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 끝에 나는 동물원 원장으로 있다가 은퇴하신 프랭크 할아버지를 찾았다.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질문내용과 별 관계 없는 다람쥐학 일반강의를 두 시간 동안이나 들어야 했다. 그러나 몇 가지 교훈도 얻었다. 첫째, 염분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땅콩만 줄 것. 둘째, 땅콩을 얻는 과정에서 다람이가 최대한 운동을 하도록 만들 것.


다람이는 땅콩을 얻기 위해 이층 베란다까지 올라와야 했으므로, 운동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정확히 알고 있던 것은 다람이가 돌아갈 때 아래층 창밖으로 비어져 나온 에어컨 귀퉁이로 힘차게 뛰어내린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곳에서 잔디밭까지 어른 키의 한 배 반이 넘는 높이를 어떻게 내려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다람이는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이제 그녀는 배가 고프면 거실까지 들어와서 눈알을 굴리며 무언의 요구를 했다. 이전의 수줍어하던 모습은 빼앗다시피 입으로 가져가는 땅콩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증발해 버렸다. 우리는 모두 행복했으며, 겨울이 오기 전까지 몇 달간을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기를 소망했다.


첫 가을비가 내린 후였다. 나뭇잎이 노란 빛을 띠기 시작할 때, 나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아파트 아래층 가족들이 몇 달간 '고통'을 견디다 못해 조심스레 문제제기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서야 다람이의 '착지과정'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아래층 에어컨을 힘차게 밟고 난 그녀는 그 집 앞 베란다 문 앞의 방충망에 매달려 있다가 땅으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음—금속제 에어컨 케이스가 울리는 소리와 얇은 철망으로 된 방충망에 매달리는 소리—이 아래층 가족들을 적잖이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 과정을 미루어 볼 때, 아래층 가족들이 다람쥐를 보는 관점도 우리와는 사뭇 달랐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다람이의 눈을 보았지만, 그들은 아마 아랫배를 주로 보았을 터였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미안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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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규

편지에 따르면, 그동안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아래층 방충망을 두 번이나 교체해야 했다. 다람이의 날카로운 발톱이 떠올랐다. 편지는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나는 즉시 사무소를 찾아갔다. 길을 걷는 발걸음이 내 마음만큼 무거웠다.

"이제 다람이를 만날 수 없다니…"

나는 폐를 끼친 데 대해 즉시 사과를 했다. 사무소의 주디는 다람쥐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두 '관점'에 대해서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다람쥐를 아주 귀여워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래층 사람들은 후자에 속한다고 말해주었다.

"차라리 새들에게 밥을 주는 게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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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규

어림없는 소리, 어찌 내 마음이 두 개일 것을 요구한단 말인가. 그 말은 첫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걱정 마, 세상에 사람이 어디 그 사람뿐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의미할 뿐이었다. "걱정 말아요, 세상이 어디 동물이 다람쥐뿐이에요?"

나는 그 후 닫힌 베란다 문 뒤로 몇 분씩이나 기다리다가 돌아가는 다람이를 보았다. 유리창 뒤로 여전히 검은 눈이 슬퍼 보였다. 실망하는 횟수가 늘수록 기다리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이제 더 이상 다람이는 찾아오지 않았다.

부엌선반 위에 놓인 묵직한 땅콩 봉투가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상징하듯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다람이가 찾아와 기다리던 베란다 위로 낙엽이 쌓이고, 곧 눈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나는 다람이가 이 추운 위스콘신의 겨울을 잘 견뎌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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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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