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지킨 땅, 목화씨가 점령했네

[섬이야기12] 전남 목포 고하도의 두 기념비(碑)

등록 2005.10.18 12:40수정 2005.10.1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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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도는 목포의 높은 산(유달산) 밑이 있는(高下) 섬(島)으로, 보화도(寶和島), 비하도(非霞島) 등으로 불렸다. 영산강 하구언의 빗장처럼 길게 누워 있는 고하도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의 전략지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최초로 '육지면'을 시험 재배했던 곳이다. 이를 기억하는 두 개의 비가 고하도 '원마을' 뒤쪽 구릉지에 세워져 있다.

a 고하도 옛모습(출처: 목포문화원).

고하도 옛모습(출처: 목포문화원).

이순신은 고하도에서 무슨 일을 했나

1579년 이순신은 명량에서 대승을 거두고 진을 고군산군도까지 올라간다. 10월 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겨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선과 군비를 확충한 다음 이듬해 2월 17일 고금도 덕동으로 진을 옮겼다. 날짜로 보면 108일간 고하도에 머물렀다.

이순신은 고하도에 머무르면서 '해로통행첩' 제도를 실시했다고 한다. 이 제도는 고하도 인근 해로를 통행을 허락하는 증명서로 통행첩을 갖지 않으면 적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위쪽 칠산어장에서 잡은 고기나 소금을 영산강을 이용해 뭍으로 운반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고하도 일대의 해로는 늘 많은 어선들이 드나들었다. 이런 까닭에 많은 배들이 곡식을 내고 통행첩을 받아갔고, 지원한 장정들을 모아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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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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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고하도 수영 뒷산 남쪽 사면에 무기 제조창을 설치했다. ...... 무안, 영암의 대장장이들도 불러들였다. 목재를 구워서 숯을 만들고 숯불을 쇠를 녹였다.
- 김훈, <칼의 노래> 중 '물들이기'


인간 이순신을 그려냈다는 김훈의 <칼의 노래>의 일부이다. 명량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고하도에 수영을 마련하고, 인근 영암과 무안의 솜씨가 좋은 목수와 대장장이들을 모아 병기와 병선을 준비했다고 그리고 있다. 이순신도 자신의 칼에 검명을 새겨 넣었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불들이도다.
一揮掃蕩 血染山河



소설가의 상상력은 끝이 없다. 이순신은 여덟 자의 글 중 '옷감에 물을 들이듯이, 바다의 색을 바꾸는 것'이라며 '염(染)'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바다를 물들일 만큼 적도 많기 때문이란다.

이순신은 명량대첩에서 승리한 후 고군산군도에서 울돌목에 이르는 곳을 면밀히 살펴 본 후에 1597년 10월 29일 이곳에 성을 쌓고 수영을 마련했다. 그리고 다음해 10월 27일까지 고금도로 진을 옮길 때까지 고하도에서 108일간 머물렀다(목포 향토사학자 김정섭은 107일이라고 주장한다). 이곳에서는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비축했다고 한다.

이충무공유허비는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고하도를 전략기지로 삼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경종 2년(1722) 8월 통제사 오중주와 충무공 5대 손인 이봉상에 의해 완성됐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에 야산에 버려져 있는 것을 해방 이후 1949년 현 위치에 세우면서 비각을 마련했다.


목포의 이충무공 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4월 28일이면 고하도에서 탄신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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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수탈의 신호탄, 육지면 재배

이충무공유허비가 있는 뒤쪽 구릉지, 즉 포구에서 원마을로 가는 서쪽 구릉지에는 육지면발상지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비석은 아니지만 고하도가 최초 육지면을 시험 재배한 곳임을 알 수 있는 있는 유일한 알림 역할을 한다. 주민들도 이것이 있는지 모를 정도다.

경제성을 고려하면 목화는 크게 해도면, 육지면, 인도면, 아시아면으로 나눌 수 있다. 해도면은 열대 남아메리카가 원산이며, 육지면은 과테말라, 페루, 멕시코 남북에서 재배되는 만생종으로 미국 남부의 목화 지대에서 주로 재배되는 것으로 방적용으로 최고품이다. 인도면은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에서 재배된 것으로 현재 인도 외에서는 재배되지 않으며, 아시아면은 이란, 중국, 한국, 일본 등지에서 재배됐으며, 방적용으로는 부적당하며 카펫, 담요 등 품질이 낮은 섬유로 사용했다.

우리 나라에 목화가 전래된 것은 고려말 1363년(공민왕 12)에 문익점이 원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대에 목화 종자를 숨겨와 경상남도 산청에 살았던 장인 장천익에게 줘 재배하면서 부터였다.

지체 높은 분들이야 비단이나 모시로 옷을 해 입으면 되었지만, 서민들이나 군졸들은 무명 베가 생산되지 않았던 시절에 겨울이면 삼베나 갈(칡넝쿨)포로 옷을 해 입고 도롱이로 두르고 지낸 통에 얼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문익점이 가져온 것은 '아시아면'으로 정천익의 아들인 문래가 제사법을 발명하고, 손자 문영이 면포 짜는 법을 고안하면서 이불이나 옷에 넣는 솜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방직 원료로 이용하기에는 품질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조선에서 육지면 재배에 성공한 것은 1904년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목포에 부임한 일본영사 와카마츠 멘사부로에 의해서 1899년부터 재배됐다고 한다. 면화 재배의 경험이 있는 그는 목포에 부임한 후 면화 작황을 조사하고 일본의 육지면 재배 지역보다 유리한 조건임을 확인하고 목화 재배를 시도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목포를 기록한 <목포부사>에는

"당시 와카마츠 영사는 일본의 기후 조건은 미국산 육지면을 재배하는 데 적절하지 않은 데 반하여 한국의 기후는 강우량이 적고 이상 기후가 적다. 이런 국토와 기후는 미국 육지면 재배에 적합하다. 만약 한국에서 면작을 개량한다면 산업발달에 이바지할 수 있고, 일본의 방직 원면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일거양득의 정책이 될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목포문화원에서 발간한 <고하도>에서도 이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와카마츠 영사는 이러한 내용을 일본에 보고했지만 본국은 주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영사는 1904년 미국의 면화 종자 10여 종을 들여와 '야마자키'라는 일본인 감독을 두고 고하도 주민 김치민의 화전 2두락에 파종했다.

이렇게 해서 목포에서 육지면 재배가 성공하면서 영산강 일대와 군산 지역에까지 면화가 보급됐다. 지금의 목포시청 자리에도 면화 단지가 조성됐다고 한다. 심지어는 면화 시장이 활발해지고 자유 매매가 가능해지면서 재래면과 육지면을 섞어서 부당 이익을 챙기는 일이 발생하자 1912년 11월 조선총독부는 면화 채취 규칙을 제정하여 공포하기도 했다고 한다.

육지면재배, 무엇을 어떻게 기념해야 하나

육지면은 전남 일대에 급격하게 보급되어 1920년대에는 지역 특산물로 소개될 정도였다. 1916년 목포항에 가까운 송도신사(현 목포시 동명동) 앞에 면화 재배 10주년 기념비가 세워졌지만 지금은 비문과 사진만 전할 뿐이다. 조선총독부 농상공부장관 석종영장이 짓고, 중추원참의를 지낸 정병조가 쓴 비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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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명치 37년 목포 주재 일본 영사가 거류민으로 하여금 미국 육지면을 고하도에 처음 파종하였다. 이듬해 조선 유지들이 면화재배협회를 창설하여 목포, 자방포, 영산포, 나주, 광주, 군산 등지 각지에 파종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명치39년 통감부와 한국정부는 면업을 두루 권장하였다. (중략) 목포는 확실히 육지면 재배를 시작한 땅이요, 百貨가 집한 곳이라 후에 산업이 육성하여 서민이 부자가 되어 사람에게 널리 미쳐서 해외에 까지 차고 넘침이 끝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선은 일본의 저급면직물 생산지로 재편성됐다. 중일전쟁과 만주사변 등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많은 면직물이 필요했지만 일본 농민들은 면화를 재배하지 않고 면공업협회에서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값싼 조선 육지면을 사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조선에서 재배해 상품을 만든다면 만주 등으로 적은 물류 비용으로도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육지면 재배를 강제했고, 일본의 종연방적이나 동양방적 등 섬유 자본들이 조선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하도의 육지면 시험 재배는 그 출발점이 되었던 셈이다. 이러한 저급 면직물들은 주로 군복이나 군수용품, 관수용품으로 사용됐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좋은 옷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 이후 일제 강점기 때는 다양한 이름으로 부과되는 과도한 세금 외에 미작개량, 비료구매 강요 등과 함께 빠지지 않고 육지면 재배를 강요해 농민들을 힘들게 했다. 당시 면방식 산업은 최첨단 산업으로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성장 주도의 신활력산업쯤 되었던 모양이다. 영국을 비롯한 대부분 열강들이 그랬지만 당시 일본도 '면방직'에 주력했다.

조선 시대 일본이 고하도 일대 바다를 장악했다면 서해 바다는 물론 호남의 곡창지대는 모조리 도륙됐을 것이다. 조선 시대 서남해와 영산강의 뱃길을 넘보던 이들은 이순신과 무안·영암 일대의 백성들 때문에 그 야망을 접어야 했다. 그후 300여 년 일본제국주의는 '칼' 대신 작은 섬에 목화씨를 뿌렸다. 그리고 영암과 무안 일대에 면화 단지를 조성하고, 완도의 작은 섬에서부터 북방한계선을 넘어 추운 지방에도 육지면 재배를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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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지금 그곳에는 무화과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 옆에는 '육지면재배발상지'라는 비문이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육지면 재배 30주년을 기념해 제6대 조선 총독 우가키가즈나리(宇垣一成, 1931.6~1936.8)가 쓰고 중추원참의를 지낸 '정병조'가 1936년 세운 '육지면발상지'라는 기념비가 그것이다.

이 비는 해방 이후 뽑히고 인근 밭에 뒹굴던 것을 그래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비문의 내용처럼 최초의 육지면 재배를 '기념'해야 하는 걸까. 그것도 제국주의 모국의 모순과 전시 체제 구축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됐는데…. 기념비 옆에 조그마하게라도 육지면 재배가 일제 강점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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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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