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들은 다 보수적일 거라고요?

[해외리포트] 욤 키푸어, 그리고 미국 속의 유태인들

등록 2005.10.21 11:07수정 2005.11.1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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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나 토바!"

a 유태인들이 신년 "로시 하샤나"에 주고받는 축하카드들

유태인들이 신년 "로시 하샤나"에 주고받는 축하카드들 ⓒ 강인규

유태인들은 올 10월 4일에 새해를 맞았다. 매년 이 시기가 되면 그들은 친구들에게 보낼 연하장을 준비하고, 가족 만찬용으로 쓸 신선한 사과와 꿀을 고르며 한껏 마음이 부푼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유태인 인구를 가진 사회다. 그리고 이 600만 명의 유태계 미국인들 가운데 거의 절반이 미국 동북부의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인구가 7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미국 내의 유태인 커뮤니티가 갖는 의미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태인의 신년 '로시 하샤나'

유태인들의 신년 "로시 하샤나"가 다가올 때 북동부를 중심으로 발달한 미국의 유태인 커뮤니티를 방문하면 한껏 들뜬 축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많은 유태계 학생들이 수업에 참석할 수 없다는 이메일을 보낸 후 고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온 가족들이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열흘 뒤에 찾아올 엄숙한 종교의례절인 "욤 키푸어"를 준비한다.

a 랍비 캐츠

랍비 캐츠 ⓒ 강인규

내가 랍비 한 명을 지속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지난 3월 스승으로 모시는 한 미국 역사가로부터 매디슨의 랍비 한 분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가르칠 의향이 있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그 분은 그 랍비가 한국어를 공부하려는 동기에 대해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는 순수한 학문적 관심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지난 봄 랍비를 캠퍼스의 커피숍에서 처음 만났다. 랍비의 한국어 선생을 자청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아무런 실용적 목적 없이' 한국어를 배우려는 그 동기에 매혹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유태인들의 문화와 삶에 대한 무지를 조금이나마 덜어보자는 것이었다.


이후 우리는 한 주에 한 번씩 만나 두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서로 나누게 되었다. 랍비 캐츠가 제법 한국어를 익숙하게 받아쓰게 되었을 무렵 로시 하샤나가 찾아왔다. 우리는 그날 약속했던 히브리어 공부를 잠시 미루고 유태인의 신년 로시 하샤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사과, 꿀, 그리고 생선머리


a 유태인들이 요시 하샤나에 즐겨먹는 단 맛의 빵 '칼라'

유태인들이 요시 하샤나에 즐겨먹는 단 맛의 빵 '칼라' ⓒ 강인규

'로시 하샤나'는 '한 해(하샤나)'의 '머리(로시)'라는 뜻으로, 한국의 '신년'에 해당한다. 이 때가 되면 그들은 "샤나 토바(좋은 한 해)"라고 말하며 서로에게 축복을 기원한다. 이 날 유태인들은 꿀 바른 사과와 '칼라'라는 단 맛의 빵, 그리고 생선머리로 만든 요리를 즐긴다.

이 음식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과와 빵의 둥근 모양은 한 해가 돌아오는 순환의 과정을 의미하고, 꿀의 단 맛은 '달콤한 한 해'를 상징한다. 생선머리는 1년의 시작을 의미한다. 유태인의 명절 로시 하샤나는 단순한 신년축하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날은 유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종교적 절기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구약성경'에 해당하는 유태인의 성서 '토라'에는 이 날이 "양 뿔을 부는 날"로 기록되어 있다. 양 뿔로 잘라서 만든 나팔인 '쇼파(shofar)'는 지상에서 듣기 어려운 신비스러운 소리를 내는데, 유태인들은 이 소리를 '깨어서 심판의 날을 준비하라'는 신호로 여긴다. 유대회당에 모여 랍비가 연주하는 양 뿔 나팔소리를 듣는 것은 로시 하샤나를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다.

이야기가 이쯤 도달했을 때 랍비 캐츠는 미소를 지으며 잠깐 기다리라며 검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는 사무실 모퉁이에 놓여 있는 양 뿔 나팔을 조심스레 집어 들고는 그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 기묘한 소리는 '희생양'의 상징적 의미와 결부되어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데 그 이상의 악기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a 양뿔로 만든 나팔 "쇼파"의 사진과 랍비의 연주 모습을 그린 스케치.

양뿔로 만든 나팔 "쇼파"의 사진과 랍비의 연주 모습을 그린 스케치. ⓒ Wikimedia Commons

"욤 키푸어": 속죄의 날

로시 하샤나로 부터 열흘째 되는 날에 '욤 키푸어'가 찾아온다. '속죄(키푸어)의 날(욤)'로 번역되는 이 날은 새해 열흘째 되는 날 해가 떨어지는 순간부터 시작되어 그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 지속된다. 유태인들은 이날이 지나기까지 하루 금식을 하며 자신의 죄를 속죄한다.

욤 키푸어가 시작되고 끝나는 시점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해가 지는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랍비 캐츠는 서류 캐비닛을 열어 매일 매일 정확한 일몰시간대를 기록한 시간표를 보여주었다. 랍비는 시간표를 기상청으로부터 제공 받고 있었다.

유태인들에게 '욤 키푸어'는 일년 중 가장 엄숙하고 성스러운 날이다. 금식의 시간동안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는다. 화장을 하거나 몸을 씻지도 않으며, 남녀간의 성관계도 금지된다. 이스라엘에서는 텔레비전 방송과 대중교통수단마저 운영되지 않는다.

그러나 흔한 오해와 달리, 이 날은 유태인들에게 고통스러운 금욕이 날이 아니다. 오히려 신과 소통하는 기쁜 날이자, 신의 심판을 위한 생명책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는 소중한 기회를 누리는 날이다. 25시간에 걸친 금식은 신과의 소중한 만남에 모든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다른 곳은 돌볼 수 없는 바쁜 마음을 상징한다.

미국 내 유태인 가운데는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유대문화의 많은 부분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이들마저도 욤 키푸어만큼은 큰 의미를 두고 기념한다. 이날의 금식은 대단히 중요한 행사지만, 노약자들이나 임산부들에게는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항상 일깨운다는 것이 랍비 캐츠의 설명이다.

미국내 유태인: "지배적 소수자"

a 미국의 한 유대회당

미국의 한 유대회당 ⓒ 강인규

미국 내의 유태인은 전체 인구의 2퍼센트가 조금 넘을 뿐이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해 왔다.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인 가운데 37퍼센트가 유태인이라는 통계수치는 그 사실의 일부만을 설명해 줄 뿐이다. 레너드 번스타인, 토마스 쿤, 데이비드 사노프, 스티븐 스필버그, 우디 앨런, 본 조비, 조셉 퓰리처, 이작 펄만, 노암 촘스키 등 걸출한 인물들이 예술, 과학, 인문학, 연예, 산업 등 모든 영역에서 성취에 성취를 거듭해 왔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수세기동안 차별과 혐오로 고통 받아왔고, 이 사실은 미국 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유럽에서와 같은 반유대주의적 폭력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차별을 피해서 미국으로 이주해 온 많은 유태인들은 오랫동안 동등한 미국시민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오늘날 유태계 미국인들의 연평균 소득은 비유태계 미국인보다 8천불 이상이 더 높다. 유태인들의 대학진학률은 비유태계의 두 배이고, 대학원 진학률은 무려 다섯 배가 더 높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유태인을 겨냥한 차별의 징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미국 역사가 박우상은 유태인들의 이런 미묘한 사회적 지위를 "지배적 소수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유태인들이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그리고 미국 정착과정에서 겪은 가난과 차별의 고통은 그들을 사회개혁 운동으로 이끌었다. 유태인들은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과 인종차별 폐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싸워 왔으며, 오랫동안 지속된 유태인들의 이러한 진보적 전통은 정당 지지 성향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난 2004년 대선에서 유태계 미국인들 가운데 70퍼센트가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한국인을 포함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유태인들의 정치성향에 대해 그릇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미국 내의 유태인들은 평균적인 미국인들보다 부시의 '테러정책'에 더 비판적이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한 최초의 나라이고, 공화당의 대외정책이 반 아랍-친이스라엘 정책을 표방해 온 데서 비롯된 고정관념인 것이다.

미국 기독교도의 70퍼센트가 부시의 대테러 전쟁을 지지하는 반면, 유태계 미국인들은 46퍼센트만이 이 정책에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러나 부시의 친이스라엘 정책이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유태인 커뮤니티에 미약하나마 보수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부시의 2000년 첫 대선에서 그에게 표를 던진 유태인은 1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계속되는 차별

a 1930년대에 미국에 나돌았던 반유대주의 선전물. 유태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가 공산주의를 부추기고 있기에 이를 보이코트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30년대에 미국에 나돌았던 반유대주의 선전물. 유태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가 공산주의를 부추기고 있기에 이를 보이코트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USC

히틀러를 유태인 학살로 이끈 것은 종교적 이유를 포함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유태인들의 개혁성향이었다. 히틀러에게 통치의 토대를 제공한 주요 정책 기조가 '반유대주의,' '반공,' '우익'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히틀러의 눈에 유태인들은 이념적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빨갱이'로 보였다. 유태인들의 개혁성향은 미국 내에서도 파시스트적 반공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반유대주의의 차별을 낳곤 했다.

70퍼센트가 민주당을 지지하는 '놀라운' 정치적 진보성을 이야기로 꺼내자, 랍비 캐츠는 웃으면서 "하지만 30퍼센트나 되는 사람이 보수정당을 지지하고 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유태계 사회에서 30퍼센트나 되는 사람이 공화당에게 표를 던졌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미국 내 유태인의 이민사는 미국 건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들은 아직도 차별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태인의 이미지는 반유대주의적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고전문학을 통해, 그리고 현대판 '유머'를 통해서 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여전히 랍비 캐츠는 주위에서 겪은 웃지 못할 이야기 하나를 말해 주었다. 한 친구의 딸이 유태인이 많지 않는 미국 어느 주에 있는 기숙학교를 가게 되었다. 어느 날 기숙사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녀는 누군가 자신의 이마를 만지고 있는 것을 알고서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어난다. 그녀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것은 같은 방을 쓰던 친구였다. 그 친구는 놀란 그 친구에게 사과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어렸을 때 유태인들이 뿔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 만져 본 거야."

딸은 장난기를 발휘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넘어져서 생긴 머리 위쪽의 상처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응, 여기에 커다란 뿔이 있었는데, 이곳에 오기 전에 병원에서 떼어 버리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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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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