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은 김재규의 우발적 행동? 결코 아니다"

[인터뷰] 김재규 변론한 안동일 변호사... "국민 희생 막기위해 박정희 쏴"

등록 2005.10.25 14:46수정 2005.10.2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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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 당시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는 10·26 사건 26주기를 앞두고 사건 및 재판 진행 과정을 조명한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를 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당시 수사당국은 처음부터 10.26을 '자기가 제거될 것이라고 우려한 김재규의 우발적 행동'으로 규정했다.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유신체제의 막을 내린 10.26사건 26주년을 앞두고 출간된 책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민감한 역사적 사안을 다뤘을 뿐 아니라 책을 펴낸 이의 경력 때문이다. 지은이 안동일(65) 변호사는 10.26사건의 당사자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1심부터 3심까지 모두 변론했다.

사건 직후부터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김 전 부장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안 변호사. 그가 지금 시점에서 10.26사건 재판을 돌아보는 기록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오마이뉴스>는 24일 오후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는 안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뒤틀린 현대사에 10.26의 진실 묻혔다"

"10.26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아요. 수사당국이 김재규를 '배은망덕한 패륜아' 혹은 '대역죄인'으로 몰아간 발표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는 사람도 아직 많은 것 같고요."

안 변호사는 10.26 직후 일어난 12.12 군사반란으로 우리 현대사가 뒤틀린 데서 그 원인을 찾았다. "'3공 유얼(유복자)' 5공화국과 군사문화의 연장선에 놓였던 6공화국 등 군사정권이 13년이나 더 지속되면서, 박정희 군부정권 18년을 끝낸 10.26의 진실이 묻혔다"는 것이다.

안 변호사는 사건내용 대부분이 수사기록에만 의존해 세상에 알려진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형사재판의 요체는 공판중심주의인데 당사자의 법정 진술이 담긴 공판조서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수사기록 위주로 사건내용을 구성,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10.26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안 변호사는 "가려진 진실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자료를 제시하는 게 내 몫이며 김재규에 대한 판단은 역사와 독자의 몫"이라고 전제하면서도 "10.26의 의미는 이후 역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 변호사는 "당시 군 검찰 주장과 달리 김재규는 '우발범'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있는 한 민주회복은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10.26을 준비했고 10.26을 '민주회복 국민혁명'으로 규정했어요. '우연'이 아닌 '필연', 즉 당연히 있어야 할 사건으로 10.26을 바라본 겁니다."

"박정희 제거하면 혁명가로 추앙할 것으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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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 보도사진연감


안 변호사는 10.26 직전 발생한 부마항쟁도 김 전 부장이 그런 판단을 내리는 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김재규는 현장을 방문한 뒤 항쟁이 5대 도시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어요. 그리고 그 경우 (박정희의 성격상) 4.19보다 더 큰 희생이 일어날 거라고 판단합니다. 김재규는 그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쐈던 거죠. 박정희와 개인적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만 대의를 위해 소의를 버린 겁니다."

안 변호사는 김 전 부장이 '민주회복 국민혁명'의 결의를 다지며 1979년 봄부터 썼다는 휘호 6점 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그는 민주회복에 대한 대의를 10.26 사건보다 훨씬 이른 시점부터 가슴에 품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군 검찰은 김재규가 민주회복이나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 이른바 '반체제' 변호사인 우리 변호인단에게 교육받은 결과가 아니냐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김재규는 우리를 만나기 전부터 그 부분에 대한 확신이 있어 보였습니다."

안 변호사는 "김재규는 박정희를 제거하면 전 국민이 자신을 '혁명가'로 추앙할 거라는 믿음과 '혁명'이 성공하면 미국이 자신을 지지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착각'으로 드러났다"고 풀이했다.

안 변호사는 10.26사건의 의미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이후 역사가 전개된 양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10.26 직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자유민주주의 실천, 긴급조치 해제 등을 발표했어요. 정치범들이 감옥에서 풀려났고 김대중씨도 오랜 가택연금에서 해제됐습니다. 10.26으로 민주회복의 길이 열린 겁니다."

"5.18항쟁과 6.10항쟁의 바탕에는 10.26사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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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렇기 때문에 안 변호사는 "(당시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유신체제가 무너지는 순간의 느낌이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라며 '부마항쟁 등에서 표출된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박 정권을 무너뜨리고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하는 길을 오히려 10.26사건이 막았다'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어 "어쩌다가 12.12사태가 일어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가 지체되긴 했지만 5.18항쟁과 6.10항쟁 등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유신의 핵을 제거한 10.26이 놓여 있다"고 말했다. "10.26이 민주화의 바탕을 이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게 안 변호사의 판단이다.

그런 배경에서 안 변호사는 뒤늦게라도 그의 명예를 회복해줘야 한다고 믿는다. 안 변호사가 재판 기록, 법정에서 메모해둔 내용 등 사과상자 두 개에 달하는 자료를 하나하나 다시 살펴 정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에 책을 낸 안 변호사의 첫 소감은 "25년만에 밀린 숙제를 마친 것 같다"는 것. 그의 숙제는 끝났지만 독자들에게는 10.26사건의 실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새로운 숙제가 생긴 셈이다.

"아마도 3공·5공의 부라퀴(자기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영악하게 덤비는 사람)들은 '패륜아를 비호하는 책이 말이 되느냐'고 날 공박하겠지요. 그러나 사반세기가 지났어도 10.26은 우리에게 여전히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남아 있습니다. 흘러간 과거사로 치부하기보다는 26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 김재규가 법정에서 어떤 주장을 했는지, 10.26이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겼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선배님, 도망가세요".. 80년 김재규 사형선고 뒤 피신
[안동일 변호사는] KAL폭파사건 김현희, 조세형 등 변론

ⓒ오마이뉴스 남소연
"1980년 5월 20일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사형)이 내려졌어요. 사형만은 막아보려 노력했지만 뜻대로 안 되더군요.

그런데 선고가 내려진 직후 법정 바깥에서 보안사 법무관이 다가와 조용히 전하더군요. '선배님들,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패륜아' 김재규를 너무 열심히 변호해 신군부의 눈 밖에 난 거죠."

안동일 변호사가 전하는 김재규 재판 이후의 한 풍경이다. 당시 변호인단 대부분은 그 즉시 몸을 피했지만 사무실에 잠시 들렀던 강신옥 변호사는 바로 잡혀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당시 광주 문제가 커지면서 우리에 대한 신군부의 관심이 줄었죠. 덕분에 강신옥 변호사는 20일 정도 고생했지만 우리는 별 일 없이 넘어갔습니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김재규 전 중정부장 변호를 맡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그렇진 않았어요. 오히려 역사의 현장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됐고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하려 노력했습니다."

10.26사건을 다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족에게서 소송을 당했던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영화 나온 뒤 곧바로 봤어요. 다소 과장된 부분도 있더군요. 그렇지만 영화인데 뭘 그런 걸 갖고 소송까지..."

'4.19세대'인 안 변호사는 KAL858 폭파 사건의 김현희, 대도 조세형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을 변론했으며 군사정권 시절 '야생초 편지' 주인공 황대권씨가 연루됐던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비롯한 시국사건 변호도 많이 맡았다.

지난해에는 김현희씨를 변호한 경험을 담아 <나는 김현희의 실체를 보았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한편 안 변호사는 지난 18일 여타 보수인사들과 함께 '제2시국선언'에 서명했으며 지난해 9월에는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를 내걸었던 첫 번째 '시국선언'에도 동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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