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홍시 덕에 서로 알게 됐으니 좋잖아요"

잘 익은 감 덕에 그 동안 모르고 지냈던 어르신을 알게 됐어요

등록 2005.10.27 16:44수정 2005.10.27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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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조금 떨어진 재활용센터 뒤뜰엔 감나무와 모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재활용센터 길목엔 고장 난 선풍기와 세탁기가 장사진을 치고 있다. 그 끝 지점엔 누가 갔다 버렸는지 몹쓸 쓰레기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늘진 곳이라 사람들이 남몰래 마구 버리는 것 같았다. 감나무와 모과나무는 그것들엔 아랑곳없이 탐스럽고 큼지막한 감과 모과를 멋지게 선보이고 있다.


오늘 아침에 커피를 뽑아들고 그 길목을 지나왔다. 평소엔 집 앞 음식점 밖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는데 그 자판기가 돈을 삼켜 버린 바람에 먼 곳까지 가서 커피를 뽑아 왔던 것이다. 평소에도 가끔씩은 그 길을 지나치긴 하는데, 그때마다 보게 되는 것은 감나무와 모과나무였다. 물론 그 옆에 울타리가 세워져 있는 집 한 채가 있긴 했지만 그곳은 내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 곳에서 사람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그 길목에 아주머니 한 분과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그 분들은 감을 따고 있었다. 잠자리 잡는 채 같은 것으로 감을 하나 둘 따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 분들이 그 집에서 살고 있었고 또 그 감나무의 주인인 줄은 전혀 몰랐다. 충주에 산지도 열 달이 넘었건만, 등잔 밑은 그렇게 한참이나 어두웠던 것이다.

며느리는 감을 따고,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딴 감을 받고, 참 다정하고 정겨운 모습이었어요. 가까이 살면서도 이 분들과 모르고 지냈는데, 오늘  감을 따고 있어서 알게 됐어요. 참 좋은 분들이었지요.
며느리는 감을 따고,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딴 감을 받고, 참 다정하고 정겨운 모습이었어요. 가까이 살면서도 이 분들과 모르고 지냈는데, 오늘 감을 따고 있어서 알게 됐어요. 참 좋은 분들이었지요.권성권
"안녕하세요. 여기 사세요?”
“예.”

“지나치면서 집은 봤지만, 사람은 안 사는 줄 알았어요.”
“아, 그러셨어요.”

“감이 참 많이 열렸네요.”
“예, 올해는 풍년이네요.”


내가 보기에도 감나무에는 많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른 탓인지 감이 많이 익지는 않는 듯했다. 그 가운데서 물렁물렁한 감만을 골라 따고 있었으니, 꽤나 힘들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잘 익은 감들은 죄다 꼭대기에 매달려 있어서, 거기까지는 엄두도 못 낼 듯했다.

그래도 그 아주머니는 의자를 딛고서 팔을 연이어 뻗고 있었다. 장대가 미치는 곳까지, 익은 감들은 죄다 딸 듯한 기세였다. 만약 그것들을 따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땅에 떨어져 밟힐 것들이었으니, 할 수만 있으면 따주는 게 나을 듯싶었다.


나도 그 분에게 힘을 보탤 요량으로 잘 익은 감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순간 숨어 있는 듯한 감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주 빨갛고 잘 익은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곧바로 그 감을 향해 장대 그물을 내 뻗었다. 그리곤 조심스레 그 감을 따냈다.

“감을 받으시는 분이 할머님이신가요?”
“예. 시어머니예요.”

“상당히 정정해 보이시네요?”
“올해로 아흔이세요.”

“아흔이시라면 누가 믿지 않겠는데요.”
“그렇겠어요. 고맙네요.”

“그나저나 감이나 하나 가지고 가서 드실래요?”
“아이쿠,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이 홍시 덕에 서로 알게 됐으니 좋잖아요.”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며느리 되는 그 분은 시어머니에게 허락을 받고서, 내게 잘 익은 감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홍씨는 말랑말랑한 도를 넘어서 물컹물컹했다. 벌써 한쪽 볼이 터져서 속살까지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아마도 그 분이 딴 것들 중에서 가장 잘 익은 것이지 않나 싶었다. 어찌나 달콤하게 보이던지 그것을 들고 집으로 가는 동안 침이 절로 나왔다.

며느리는 감을 따고 아흔이 되신 시어머니는 그 며느리의 감을 받는, 그 분들의 모습은 볼수록 그리고 생각할수록 다정하고 정겨웠다. 오늘은 그 홍시 덕에, 그때까지도 모르고 지냈던 좋은 이웃사촌을 알게 됐으니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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