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역사>문학동네
세계 최대 최고(最古)의 국제 국제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올해도 어김없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특히 이번 도서전은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대되었을 뿐 아니라 노벨 문학상 후보에 고은씨가 거론되는 등 그 어느 해보다 한국의 출판 행사들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을 수 있었던 뜻 깊은 자리.
다채로운 출판 행사가 펼쳐진 가운데 한국의 주빈국 행사만큼이나 주목을 끈 행사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세계 신화 총서>의 출간 기념 간담회였다. 국제 도서전에서 개별 도서의 출간 기념 간담회가 열리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지만 전 세계 30여 개국 이상 100여명의 기자들이 열띤 취재경쟁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간담회가 2005년 전세계 출판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될 프로젝트의 첫 발표자리이기 때문.
<세계 신화 총서>는 스코틀랜드 케넌게이트 출판사의 수석 편집자이자 발행인인 제이미 빙이 6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내놓은 야심작으로 그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세계 최고의 작가들에게, 작가가 원하는 신화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다시 말하게 하는 프로젝트'. 성경을 비롯하여 그리스, 이슬람, 남미, 아프리카 신화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신화들이 채택 소개될 예정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작품의 내용이나 스타일이 전적으로 작가의 선택의 문제이며, 픽션이 될 수도 있고 논픽션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즉, 작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시각과 문체가 고스란히 녹아 있음으로써 기존 총서들의 천편일률적인, 그렇기에 자칫 단조로운 시각이 노출되는 문제점을 벗어나는 모방을 넘어 혁신적인 프로젝트라는 데 있다.
현재까지 확정된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영국의 종교 연구가인 카렌 암스트롱, 부커상 수상작가이자, 최초의 페미니즘 작가라고 일컬어지는 마거릿 애트우드, 21세기의 버지니아 울프로 칭송받는 재닛 윈터슨을 비롯하여 데이비드 그로스만, 도나 타트 등이 있으며, 오르한 파묵, 이사벨 아옌데, 주제 사라마구, 토니 모리슨 등의 작가들과 계약을 추진하고 있는 등 현존하는 전세계 최고의 집필진으로 구성되고 있다.
이번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통해 처음 소개된 작품은 총 3작품으로 그 첫 발은 세계적인 종교 연구가인 카렌 암스트롱의 <신화의 역사>이다.
1만 2000년의 인류 역사를 총 여섯 시대로 구분하여 각 시대에 나타나는 신화의 특징을 설명하고, 인류의 기원과 역사를 설명함에 있어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유효하기 때문에 진실'인 신화가 가지는 의미와 역할을 새삼 일깨워주는 신화 역사 개론서이자,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를 소개하는 입문서로써의 역할을 십분 발휘하고 있는 작품.
눈여겨 볼 점은 국내에 그리스 로마 신화의 대중화를 선도한 이윤기씨의 딸 이다희씨가 이 작품의 번역을 맡았고, 이윤기씨가 감수를 했다는 점으로 이윤기씨가 예의 작품들에서 선보였던 쉽고 간결한 번역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두 번째 소개작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페넬로피아드>. 최고의 페미니스트 작가다운 면모가 고스란히 표출되어 있는 작품으로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서양의 대표적인 고전 <오디세이아>를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아닌, 그의 아내 페넬로페의 시점으로 바라본다.
그리스 신화의 대표적인 마초영웅 오디세우스의 아내로 살아가면서 그의 방랑기질과 여성편력, 영웅 콤플렉스를 감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숨겨왔던 속마음이 살아생전 라에르테스의 수의를 지겹도록 짜고 풀고 반복했던 한풀이를 하듯 속시원하게 털어 놓는다.
특히 오디세우스가 살해한 열두 명의 시녀들이 중간중간 동요, 목가, 연극 등 다양한 형식으로 등장하여 오디세우스의 비밀을 폭로하는 부분은 마치 한 편의 풍자 뮤지컬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패미니즘의 거장다운 마거릿 애트우드의 풍부한 위트와 해학이 넘쳐난다.
마지막 작품은 재닛 윈터슨의 소설 <무게>로 올림푸스 신들에 저항하며 반란을 주도한 벌로써 지구를 떠받치게 된 외로운 침묵의 '거인' 아틀라스를 향한 작가의 애틋한 감정이 비록 잠시이긴 하지만 '깡패' 헤라클래스라는 말동무와 휴식이라는 달콤한 선물로 전달된다.
이처럼 처음 소개되는 3작품의 면면만을 살펴보더라도 백년 이상 읽힐 수 있는 고전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2038년 3월 15일 제 100권을 발행할 예정인 이 <세계 신화 총서> 프로젝트는 대단한 성공작이자, 조심스레 출판계의 신화 그 자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키리노 나츠오, 수 통과 같은 주변국 중국과 일본의 작가들이 이미 계약을 마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작가가 아직 언급이 되지 못했다는 부분이다.
이 시리즈가 번역 출간되는 전세계 31개국 중 한국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의 신성한 전승설화가 소개하지 않고서는 <세계 신화 총서>의 기획 의도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지나친 기우에 불과하리라. (문학동네 / 9500원)
[역사] 건축사의 대사건들 – 우르술라 무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