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만에 벗겨진 누명, 진실은 아직 잠자고 있다

[인터뷰] 결국 무죄판결 받은 '조작간첩' 함주명씨의 삶

등록 2005.11.01 14:14수정 2005.11.0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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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5일, 서울의 한 법정에서 75세의 한 노인이 환희의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말은 환희라지만, 그것은 분단과 독재의 현대사가 한 인간에게서 짜낼 수 있는 최다량의 피눈물이기도 했다. "원심을 파기한다. 피고인은 무죄!" 이호원 판사는 판사석에 앉자마자 이례적으로, 전후좌우 절차를 생략하고 함주명씨에 대한 무죄 사실부터 선포했다. 국가권력에 의해 삶을 농락당하고 그 수족이던 사법부에 의해 진실을 묵살당한 한 노인에 대한 뒤늦은 사과와 배려였을 것이다.

a 함주명씨

함주명씨 ⓒ 인권위 김윤섭

"꼭 살아 나가서 억울한 누명을 벗겠다는 신념이 없었다면 16년 동안 감옥에서 버텨낼 수 없었을 겁니다."

당뇨와 간경화를 앓으면서도 두부공장에 출역을 자원해 콩물을 마시고 두부를 먹으면서 건강을 다스린 이유가 바로 이 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법정에서의 그 순간을 이야기하는 그의 눈에서는 또다시 물기가 피어오른다. 역사가 그의 영혼에 낸 상처에서 늘 저렇게 새록새록 피눈물이 솟아나는 것이리라 생각하니, 마치 내가 전두환이고 이근안인 것처럼 잠시 몸 둘 바 몰랐다.

"판결 받고 나서 삶의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안사람이 조그만 식당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만, 전에는 뭐랄까, 좋지 않은 말을 들어가면서 수모를 받아가면서 일을 했는데 무죄를 받고 나니까 식당 오는 손님들 자체가 달라지더라고요. 그 다음날 보도를 보고, 그러신 분인 줄 몰랐다, 미안하다, 그동안 큰소리도 많이 치고 싸움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앞으론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며 사과하더군요. 애들도 좋아하죠. 막상 무죄 판결을 받으니까 내 기쁨을 떠나서 애들이 더 좋아하더라고요. 선고하던 날 재판정에서 나 자신도 많이 울었습니다만 애들, 집사람, 누님 할 것 없이 통곡하다시피 좋아하고 눈물 흘리고 그랬습니다. 셋째 아들이 나 때문에 두 번이나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져야 했는데, 이제 마음 놓고 사귀어 보라고 했죠."

그가 간첩누명을 쓰고 살아온 지난 22년 동안 그뿐만 아니라 가족, 일가친척, 동창생 등 주변의 누구 하나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일가친척 모두 그렇지만, 특히 형님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간첩의 형이라는 이유로 수모도 많이 당했죠. 야, 니 동생이 간첩이라니 그럴 수 있냐. 누님이 지금 80이신데 그 연로한 나이에도 나 뒷바라지하느라고 고생 많이 했고요. 집사람이 내 뒷바라지할 여유가 없었던 건 애들을 키워야 했으니까요. 식당종업원, 파출부, 삯바느질하면서 애들 셋 다 대학 졸업시켰으니, 나도 16년 동안 고생하긴 했지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더 고생이었죠. 나는 차라리 감옥에서는 양심수로 대우를 받았거든요."

이제 와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한들, 무엇으로 그 빼앗긴 삶을 보상받겠는가마는, 함주명 씨는 요즘처럼 행복하고 기쁠 때가 없다고 했다.


"날아갈 것 같아요. 1998년 석방된 이후로도 보안관찰 대상으로 끊임없이 경찰의 감시와 관리를 받아야 했거든요. 이제 고향인 개성에도 갈 수 있고 금강산에도 갈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a 남영동 보안분실 앞에서

남영동 보안분실 앞에서 ⓒ 인권위 김윤섭


지난 1983년 45일간의 불법감금과 63일간의 모진 고문 끝에 간첩으로 조작되어 16년간 옥살이를 했고 6년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지난 7월 무죄선고를 받은 함씨의 삶은 그 자체가 대하 역사드라마다.

개성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잣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온 집안의 귀여움을 받으며 철부지 개구쟁이로 자라던 미소년에게 분단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내라고 강요한 첫 사건은 6·25전쟁이었다. 당시 개성상고 5학년에 재학 중이던 주명은 학교에 갔다가 인민군에 의해 바로 전장으로 끌려갔고 한쪽 눈을 잃은 상이군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니 빈집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쪽으로 피난 간 가족들을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남파'를 자청, 1954년 휴전선을 넘자마자 귀순한 그는 당시에도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결국 혐의를 벗고 석방돼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의 30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그는 그저 먹고 살기 바쁜 서민이었다. 아무리 죄가 없어도 엄혹한 반공독재 치하에서 간첩이었다는 딱지는 늘 그를 따라다녔고 김일성대학까지 다닌 고학력에도 불구하고 번듯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던 그는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지만 가난에 지친 첫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광업소에 일하며 만난 지금의 아내와 셋째 아들을 낳고 그런 대로 열심히 살아가던 그를, 1983년 뒤틀린 역사는 또다시 형장에 불러 세웠다.

"2월 18일, 납품하러 가던 중에 종로5가 기독교회관 앞에서 일단의 사내들에게 납치되듯이 끌려갔다. 그곳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그때로부터 함주명은 영장이 발부된 4월 4일까지 45일 동안을 불법 감금되었고, 검찰에 송치된 4월 21일까지 63일에 걸쳐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등 혹독한 고문수사를 받아야 했다."
- <민주가족> '함주명의 빼앗긴 세월, 그리고 또 다른 함주명들' 중에서


"이 개 같은 새끼야. 너를 교육하고 너를 남파시킨 행동대원이 와 있는데..."

그때부터 "남파 후 자수한 것이 허위이며, 계속 북한의 지령에 따라 간첩활동을 하면서 북한공작원과 접선하고 공작금을 수수했다는 사실을 시인하라"는 이근안 일당의 고문이 시작되었다.

"고문이라는 게 참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겁니다. 아무리 내 주장을 하고 싶어도 자기네들이 이미 각본을 써놓고 거기 맞추는 거예요. 우선 잠을 못 자게 해요. 어떻게 잠을 안 재우냐 하면, 출생부터 지금까지 행적을 전부 적으라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느냐는 것까지. 그때 내 나이가 쉰네 살이었는데, 그게 다 써집니까? 그리고 잠을 못 자니 깜박깜박 졸지 않겠어요. 그러면 손바닥을 빨랫방망이로 내리치면서 쓰라고 그러고. 잠을 못 자니까 아무 느낌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고. 그때 가서 뭘 쓰면 제대로 써지겠어요. 이근안이가 덩치가 황소만하고 주먹이 무지막지하게 크거든요. 그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쳐대는데 숨을 못 쉴 지경이죠."

칠성판 위에 꼼짝 못하게 묶어 놓은 다음 입에 수건을 덮고 샤워꼭지를 틀어대면 공기 대신 물만 들어오니까 못 견뎌서 실신한다. 그러면 내려놓고 배를 누르거나 밟아서 한 양동이 분량의 물을 빼낸다. 그리고 또다시 물고문. 욕조고문. 하지만 이런 고문은 차라리 기절이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인 편이었다. 손바닥이며 어깨며 몽둥이로 계속 내리치며 퉁퉁 부어오른 손바닥과 어깨를 볼펜으로 콕콕 찔러댈 때는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자지러질 지경이었다.

결국 이근안이 불러주는 대로 "네 맞습니다, 맞습니다" 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사건은 63일 만에 검찰로 송치된다. 이근안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판부와 검사 앞에서 고문 사실을 얘기하고 결백을 호소했다.

"최모 검사라고, 공안검사로는 아주 악질로 소문난 사람이었는데 내가 고문당했다고 하니까 '이 개 같은 새끼야. 너를 교육하고 너를 남파시킨 행동대원이 와있는데 나쁜 놈의 새끼' 이러면서 나를 오히려 나쁜 놈으로 매도하더군요. 그러고 형을 구형했죠. 재판부는 무기를 선고했어요. 앞으로는 재판부도 많이 반성해야겠고, 내가 이번에 무죄 받았을 때 시민단체가 아직은 사법정의가 살아있다라고 한 보도를 봤습니다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죠."

a 남영동 보안분실에서

남영동 보안분실에서 ⓒ 인권위 김윤섭


그래도 그는 조작사건에 연루되는 다리 구실을 한 전향간첩 홍종수를 직접 찾아가 심문하는 등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호원 판사와 변론을 맡아 준 조용환 변호사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감사의 말을 되풀이했다.

"이호원 판사님이 용기를 가지고 증인 방문해 주신 것 너무 고마웠어요. 조용환 변호사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제 건도 힘들었어요. 간첩이 무죄를 받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하지만 홍종수 심문을 통해서 내가 주장한 게 다 사실이라는 게 증명이 됐거든요. 제 사건에서는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한 포인트예요. 과연 고문조작이냐 하는 것과, 나를 신고했다고 하는 남파간첩 홍종수의 이야기가 진실이냐 하는 것. 재판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느냐 하면, 내가 1954년 내려왔을 당시 수사기록을 변호사가 재판부에 요청했거든요. 과연 함주명이 위장 귀순했는지 진짜 재판받고 나왔는지 밝히려면 1954년도 재판기록 있어야겠습니다 하니까 재판부가 그 서류를 검사에게 제출하도록 했던 거예요. 근데 그걸 1년 되도록 검사가 제출을 안 해요. 핑계인즉 법원에 서류가 없다는 거예요. 재판장 말씀이 영구보존서류인데 어떻게 없을 수 있느냐 했고. 제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 사람들과 직접 가서 찾았는데도 없어요. 의심할 만한 게 1983년에 이근안씨가 나를 연행, 고문해 사건을 조작할 때 1954년 수사기록 일부 복사해서 낸 게 있거든요. 그럼 그 후에 서류 어디 갔느냐. 이근안씨가 그 서류 내놓으면 내가 위장 자수한 게 아니라는 것 들통 나니까 빼돌린 것 아니냐. 지금도 못 찾고 있어요. 그래서 그냥 재판 속개하자 해서, 암병동에 입원해 있던 홍종수가 퇴원하니까 그 집으로 판사님이 직접 찾아가 심문하게 된 거죠. 그 심문과정에서 북한에 내 처가 따로 있고, 그 처는 남파간첩의 부인으로 대우받고 있다더라고 진술한 그의 말이 사실은 남쪽에 내려와서 수사기관에서 들은 말이라 게 밝혀진 겁니다."

재판과정에서 만난 이근안 "어유, 미안합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만난 이근안에게서 "어유,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물론 용서가 안 되죠. 막상 만나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칼 있으면 찔러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죠. 저도 많이 고민했어요. 그래도 변호사나 검사가 행여라도 폭언이나 폭행을 하면 재판에 불리하게 되니까 절대로 감정을 자제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시고, 저도 어떻게든 진상을 밝혀야 되니까 참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고 나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니 22년 고통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는 것 같기는 하더군요. 미안하다고 해놓고도 대질신문에서는 형량을 줄여 보려고 그랬는지, 물고문 사실만 시인하고 전기고문은 안 했다고 발뺌을 하더라고요. 하지만 당시 고문에 가담했던 최평선이라는 수사관이 이미 '함주명 씨가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온갖 고문을 당했다'는 양심선언을 해 버렸거든요."

그러나 함주명의 행복한 끝은, 또다른 함주명들의 길고 긴 '시작'을 뜻한다. 간첩으로 조작되었다가 처음으로 무죄선고를 받은 그는, 다른 조작사건 피해자들 또한 자신처럼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무죄선고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그랬고, <인권>지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자기 얘기보다는 먼저 또 다른 함주명들을 이야기했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 재심규정이 너무 까다로워요. 신귀영씨를 비롯한 100여 건이 넘는 억울한 조작사건 피해자들이 저처럼 구제받아야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말씀처럼 과거사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그들의 누명을 벗겨 주어야 해요. 국가인권위에서도 정말이지 제 일처럼 나서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함주명씨는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인하여 때늦게 찾아온 행복마저, 마음껏 누리지 못 할지 모른다. 그에게 온전한 행복을 돌려주는 것, 그것은 남은 자들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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