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가 비싸다고라? 장보러 나오씨요"

전북 진안 5일장 스케치

등록 2005.11.04 14:22수정 2005.11.0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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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터지는 김치 기생충알 파동에 김장철을 앞두고 무, 배추 값이 금값이다. 취재 길에 일부러 하루 묵어 만난 진안 5일장에선 농민이 집에서 직접 정갈히 기른 채소를 손 댈 필요가 없도록 깔끔히 다듬어 놓고 한 무더기가 만원이었다. 포기가 조금 실한 김장용 통배추도 한 통에 1300원 꼴. 서울 큰 마트 값과 대충 따져도 반값이다.

a 진안 동양면에서 왔다는 김향선(58) 아줌마. 얘길 맛나게도 잘 하시더니 포즈 부탁엔 표정이 영 안풀셨다가 촬영이 끝나자 활짝 웃으셨다.

진안 동양면에서 왔다는 김향선(58) 아줌마. 얘길 맛나게도 잘 하시더니 포즈 부탁엔 표정이 영 안풀셨다가 촬영이 끝나자 활짝 웃으셨다. ⓒ 곽교신

"무시(무)가 무식허게 커버렸당게. 중복에 싱근(심은) 놈이여."


도무지 도회지의 채소 값과 균형이 맞지 않을 만큼 싼데, 그래도 사는 이들은 깎거나 "짜근 놈 한 개 더 얹어보랑게" 하며 흥정이다. 실한 놈 네 개 묶인 한 다발을 샀다. 단돈 5000원.

a 타히티로 간 고갱이 원색을 즐겼듯이 자연에 묻히면 누구나 원색 취향으로 바뀐다. 농어촌 시장에 울긋불긋 원색 옷이 많은 것을 '촌스럽다'고 하면 그리 말하는 이가 오히려 감각이 촌스러운 사람이다.

타히티로 간 고갱이 원색을 즐겼듯이 자연에 묻히면 누구나 원색 취향으로 바뀐다. 농어촌 시장에 울긋불긋 원색 옷이 많은 것을 '촌스럽다'고 하면 그리 말하는 이가 오히려 감각이 촌스러운 사람이다. ⓒ 곽교신

트럭에 옷가지를 싣고 진안을 비롯해 임실, 장계, 관촌, 금마장을 돈다는 '트럭 사장님'은 이런 재래 시장을 잘 홍보해 달라고 하면서도 얼굴은 찍지 말란다. 매상이 나날이 떨어진다고 걱정하면서도 "지금보다야 더 나빠지겠냐"며 웃는다. 아마 이 땅의 필부 필부들은 조선 고려 삼국시대부터도 '지금보다야 더 나빠지겠냐'면서 집권자에게 희망을 걸고 웃으며 산 착한 백성들이었으리라.

a 산에서 "실헌 놈"을 만나 땄다는 오갈피. 왼쪽은 서울선 보기 힘든 '고소'라는 채소. 특이한 향에 못먹는 이도 많지만 "한 번 그 맛에 익어뿔면 마약이랑게요" 한다.

산에서 "실헌 놈"을 만나 땄다는 오갈피. 왼쪽은 서울선 보기 힘든 '고소'라는 채소. 특이한 향에 못먹는 이도 많지만 "한 번 그 맛에 익어뿔면 마약이랑게요" 한다. ⓒ 곽교신

좌판을 벌인 아줌마 동네인 진안군 정천면 마을 뒤 '회꼴산'에서 땄다는 자연산 오갈피는 산에서 만난 듯 싱싱했다. "약장시한테 사면 쬐깐한 소쿠리루 5천원이요, 난 그냥 땄싱게 싸게 파는 것이요, 사씨요!" 하시는데 옆에 있는 '고소'만 한 다발 샀다. 2천원.

a 사는 이는 점잖게 지팡이로 이 놈 달라 저 놈 달라 가리키고, 아줌마는 열심히 봉지에 담고...

사는 이는 점잖게 지팡이로 이 놈 달라 저 놈 달라 가리키고, 아줌마는 열심히 봉지에 담고... ⓒ 곽교신

생선을 이것저것 꽤 많이 사시는 할아버지께 여쭈니 "8대 조부 지앙(기제사) 모실려구" 준비하신단다. 진안군 마령에서 장 보러 나오신 이균상(79) 할아버님. 아들이나 며느리 시키시지 왜 직접 나오셨냐니까 "그래두 내가 봐야허지라"며 표정이 엄숙하시다. 미더덕과 조개를 덤으로 받고도 막걸리 값을 "쬐깐히" 빼달라고 하셨지만, 아줌마는 생선 값에서 너무 많이 빼드렸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a 장터에 꼭 있는 철물좌판. 번성하던 옛 시절에 비하면 "심심풀이" 라고.

장터에 꼭 있는 철물좌판. 번성하던 옛 시절에 비하면 "심심풀이" 라고. ⓒ 곽교신

진안장에서 유일하게 남았다는 철물 좌판은 허름한 외양과는 달리 장인이 몸이 안 좋으셔서 사위가 대를 이은 "이래 뵈도 내력이 깊은" 2대째 가업이라고. 기술이 좋아 장을 기다려 5일을 참지 못하고 근처 장계 임실에서도 톱을 벼리러 오는 데 "톱을 재게(날카롭게) 벼려주고 4~5천원을 받으면 기름값은 나온다"며 여유로우시다.


a 팔려가서 복실이도 되고 흰둥이도 될 강아지들. 모두 6마리가 다 한 배 형제자매라고.

팔려가서 복실이도 되고 흰둥이도 될 강아지들. 모두 6마리가 다 한 배 형제자매라고. ⓒ 곽교신

주인은 "진도개 종자라닝게 그러네" 하다가 기자가 아닌 것 같다고 자꾸 되묻자 "아따, 거 뭣이냐 순종은 안되야도 반종은 된다고 봐야지라, 이-" 하며 사람좋게 웃었다. 하기사 순종 진돗개 사겠다고 이 장터를 기웃거린다면 그 사람이 되려 우습다. 주인 말대로 "이 개새끼덜 에미를 아는디 잘 키워 뿔면 든실허다니께"가 맞다면 그걸로 족하다.

a 장터엔 뭔 약을 팔던 약장수가 없다면 어딘가 허전하다.

장터엔 뭔 약을 팔던 약장수가 없다면 어딘가 허전하다. ⓒ 곽교신

"쥐새끼 두더지 다 잡아삘구 속 편히 사시요 덜!"을 외치는 약장수는 "똑같은 미제 '나비타'가 쬐깐한 놈 한 병에 16만원인디, 이건 두 봉지에 만원이구. 효과두 훨썩 낫소!" 하며 자신에 찬 얼굴이다. 약장사 죄판이 매상을 올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약효에 관한한 자신감에 넘치는 얼굴 그거 하나면 족하리라.


a 추억의 뻥튀기도 진안장에 하나 뿐.

추억의 뻥튀기도 진안장에 하나 뿐. ⓒ 곽교신

스스로 개량한 첨단 장비로 편안히 앉아 양 쪽 기계의 불을 지키는 아저씨도 어머니의 가업을 이은 대물림 사업장이다. 이 자리에서만 55년이라고. 4리터 짜리 자동차 엔진 오일 한 통 분량의 옥수수 쌀 등을 튀겨주고 4천원을 받는다. "(뻥튀기 기계) 아가리에 쑤셔 넣기 편한께로" 입구가 네모난 엔진오일 깡통을 쓴다고.

a 만두 하나 빚는데 대략 평균을 잡아보니 10초 정도. 정상급 숙련공이다.

만두 하나 빚는데 대략 평균을 잡아보니 10초 정도. 정상급 숙련공이다. ⓒ 곽교신

임실, 장계, 장수, 진안 장을 돌며 부부가 함께 장사를 하고 5일 째는 쉰다고. 만두, 찐빵, 도너츠가 종류에 상관없이 무조건 천 원에 네 개. 맛이 아주 깔끔한데 크기도 커서 천 원 어치 이상 먹기가 힘들었다.

a 국밥 대신 커피.

국밥 대신 커피. ⓒ 곽교신

아무리 다녀도 싸고 맛있는 국밥 좌판이 안 보여 물어보니 국밥은 시장 안 상설 식당에서만 판다고. 대신 촌로들은 커피나 생강차를 나누며 얘기판을 벌였다. 자연히 국밥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 놓고 나누는 회포보다 시간도 짧고 용건은 간략해질 수밖에. 솥을 내걸은 국밥 좌판집과 막걸리 사발이 있었다면 기자도 취재고 뭐고 어울려 보고 싶은 장터였건만, 이 모습은 현대화인가 추억의 상실인가. 종이컵을 든 어르신들의 표정도 뭔가 허전하다.

돌아보니 대체로 마트보다 물건 값이 싸고, 먹거리마다 내 새끼들 먹일 것인 듯 정성을 들인 것이 눈이 그대로 보인다. 우리의 정이 깃든 전통 5일장은 전국 곳곳의 도시 근처에 의외로 많이 살아 있다.

채소값이 금값이라고 연일 뉴스를 듣건만 깨끗하고 싱싱한 채소를 미안하도록 잘 다듬어 마트의 절반 값에 살 수 있는 곳. 팻말에 적힌 정가를 10원까지 정확히 계산해 기계적으로 내고 기계가 토해내는 영수증을 받아오는 곳이 아니라 정을 팔고 사는 곳. 우리의 그리운 시장인 5일장이 아직도 곳곳에서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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