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산골마을 추수 현장으로 달려갔네

[가을걷이 10] 경운기 컨베이어벨트 줄줄이 따라간 벼가 좌르르 쏟아졌다

등록 2005.11.06 15:31수정 2005.11.0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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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1명에 구경나온 할아버지까지 12명이었다. 둘이 더해지니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나갔다.

11명에 구경나온 할아버지까지 12명이었다. 둘이 더해지니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나갔다. ⓒ 김규환

70년대 들녘으로 떠나는 체험여행


동네 장정 대여섯 명이 달라붙어 달구지에 가까스로 발동기를 실어 놓으면 우지끈 곧 찌그러들 형세다. 쇠말뚝을 곳곳에 박고 발동기와 탈곡기를 연결한다. 발동기 바퀴를 돌려 시동을 켜기 위해선 동네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 코를 잡고 있는 힘을 다했는데 간혹 허리를 다치는 경우도 있었다.

가까스로 힘을 불어 넣어주면 지축을 뒤흔들며 보리와 벼를 삽시간에 훑어냈다. 70년대 중반까지는 발동기 시대였다. 한번 설치하고 철거하려면 대단한 힘이 들어가야 하므로 한 집안 농사가 널따란 공터에 죄다 쌓여 있어야 했다. 주변엔 커다란 드럼통 한 개가 기름을 먹일 준비를 하고 있다.

아버지는 내게 들려주셨다. "그 때는 도랑꽝(드럼통)을 젊은 사람 서넛이 가서 지고 와야 한다. 북면에는 석유 파는 곳이 없었제. 스물두어 살 때였어. 30리가 넘는 옥과까지 가서 고개를 넘고 넘어 세 명이 나눠지고 오면 하늘이 노랬고 허리가 끊어질 지경이었지. 그러면 하루 품삯을 쳐줬어. 그래도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있었간디."

경운기는 발동기를 대체한 농기구다. 한 때는 공존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산골짜기에 경운기가 보급되자 한적하기만 한 마을이 시도 때도 없이 통통거려 적막강산을 깨웠다. 발동기만큼은 아니어도 "탈탈탈탈" 굉음을 울리며 논밭을 갈고 가을엔 추수 현장에 투입되었다.

몰라보게 달라진 점은 농기구 모양새다. 한결 날렵하게 생겼는데 자동탈곡기와 필요한 공구를 한 번에 짐칸에 싣고 논두렁을 조금만 파서 거들어주면 웬만한 곳을 마다않고 올라왔다. 발동기가 최소 예닐곱 마지기 분량이 준비돼있어야 하지만 서너 마지기만 되어도 일거리를 찾아오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인원도 꽤나 줄어들었다. 일손이 절반으로 줄어 경운기 주인 한명에 보조 한명이 한 짝이 되어 딸려오고 가족 서너 명에 놉을 한둘만 얹으면 되었고 탈곡 솜씨도 좋아 서너 시간이면 일을 거뜬히 해치웠다.

a 각자 위치에 서고 쇠로 된 톱니에 물려 줄줄이 따라가면 벼가 좌르르 훑어졌다. 일을 하던 중에는 컨베이어벨트에 빈틈이 없어야 한다.

각자 위치에 서고 쇠로 된 톱니에 물려 줄줄이 따라가면 벼가 좌르르 훑어졌다. 일을 하던 중에는 컨베이어벨트에 빈틈이 없어야 한다. ⓒ 김규환

명견은 거리를 막론하고 주인을 찾아 수 백리를 오간다. 사람은 한 때 혁명과 사랑을 꿈꾸다가도 때가 되면 어릴 적 뼈마디와 생각의 폭을 키워준 고향을 찾아 돌아간다. 그 때 보았던 추억의 현장에 어떻게든 끼어보려고 안달이다.


부끄러운 마음과 도시에서 꼭꼭 닫고 산 탓에 농부에게 행여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국도변을 그냥 지나치고 말지만 마음 한 구석엔 논두렁에 풀썩 주저앉아 새참에 막걸리 사발 함께 기울여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할 게다.

"저도 농사를 지어봤습니다. 아 그거 내가 제일 잘 하는 겁니다. 한번 해볼게요. 나락 가마니 옮기는 게 내 몫이었는데. 볏단도 수도 없이 묶었답니다. 저 볏가리 위엔 내가 있었어요. 쥐새끼가 생쥐를 까놓고 우리 식량을 무던히도 축냈지요."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면 농촌들녘을 지키고 있는 늙은 농부가 한번 쯤 거들어주면 얼마나 오랜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날까. 아픈 상처보다 아련한 추억을 한 장 한 장 들춰내면 그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자매, 이웃사촌이 그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잡아끌어 과거 여행을 하자고 꼬드긴다.

여기는 시간이 30년 동안 정지한 장성 금곡영화마을

a 볏가리에서 볏단을 던져주면 제일 먼저 다발을 풀어줘야 하는데 작년 짚으로 묶은 것은 괜찮지만 벼이삭을 홀쳐 묶었을 경우엔 가끔 다발이 스스로 풀려 흐트러지는 일도 잦았다.

볏가리에서 볏단을 던져주면 제일 먼저 다발을 풀어줘야 하는데 작년 짚으로 묶은 것은 괜찮지만 벼이삭을 홀쳐 묶었을 경우엔 가끔 다발이 스스로 풀려 흐트러지는 일도 잦았다. ⓒ 김규환

여기는 임권택 감독이 자주 들리는 장성군 북일면 금곡영화마을이다. 여전히 세상이 고속철도에 인터넷, 첨단산업으로 강산이 변하는 속도를 10년에서 몇 개월 단위로 축소하여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금곡마을은 시간이 멈춰있다. 앞으로 갈 생각을 않고 1977년쯤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낫으로 벼를 벤다. 봄엔 못줄을 띄워 손모를 심는다. 어디 그뿐인가. 예전처럼 사람은 많지 않아도 할 것은 다 하면서 산다. 광주까지 자동차로 1시간도 안 되는 거리다. 같은 마을 젊은 부부가 흙집에서 인터넷통신을 하고 있는 사이 서리가 깨기도 전에 온 동네 사람들 거의 다 모여 추수를 하고 있었다.

재작년엔 서둘러 이장님 댁에 연락을 취하였더니 낫으로 벼를 벨 기회를 주셨다. 올핸 깜박 잊을 뻔하다가 수소문 끝에 예전 방식대로 탈곡을 한다기에 천안, 전주, 임실, 순창, 옥과, 목포, 낙안읍성, 광주에 들른 강행군 취재여행을 서둘러 접고 왔다.

애초엔 탈곡이 첫 방문지였지만 하등 도움도 안 되는 비가 와서 벼를 뒤집어 말리는 시간을 이틀 지체하다보니 사흘이나 늦춰졌다.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려고 어김없이 길을 나설 때마다 동행해준 김용철씨와 친구집에서 아침을 먹고 광주에서 나선 게 아침 7시다.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지니 심란했지만 그 분들과 운전 중 몇 번 통화를 했다. 읍내를 거쳐 가려다 백양사 나들목으로 빠져나오라는 통에 고속도로를 더 질주했다. 고창방향은 쉽게 찾았으나 두 군 경계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나니 예정시각보다 20여 분을 지체하였다.

a 앞 뒤로 두 사람이 얇고 고르게 펴주면 기계 속으로 빨려들어가 이 안에서 벼가 탈곡이 된다. 다른 기계와 달리 손이 빨려들어가는 일은 없어 안전하다. 사람이 적을 때는 벼이삭이 많이 나오는 게 단점이었다.

앞 뒤로 두 사람이 얇고 고르게 펴주면 기계 속으로 빨려들어가 이 안에서 벼가 탈곡이 된다. 다른 기계와 달리 손이 빨려들어가는 일은 없어 안전하다. 사람이 적을 때는 벼이삭이 많이 나오는 게 단점이었다. ⓒ 김규환

어찌나 내 마음을 잘 읽는지 시골 출신인 아내가 탈곡을 한다기에 서울서 챙겨준 옷은 까끄라기와 검불이 들러붙지 않는 와이셔츠와 추리닝이다. 벌써 쌓아둔 볏가리 1할을 해치웠다. 행여, 서울 놈들이 늑장을 부려 이제야 나타나느냐며 살갑게 대하지 않을까 자못 걱정이었다.

"서울서 왔습니다."
"전화 한 사람이요? 어서 오시오."
"벌써 이 마을에 다섯 번째 옵니다."

어디까지나 취재 겸 농사체험이니 둘 다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취재에 골몰하다보면 체험은 둘째 치고 농부들과 따로 놀아야 한다. 체험만 강조하다보면 취재가 빈약해지니 조화로운 하루에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팔을 걷고 나서는 길밖에 더 있겠는가.

인사를 마치고 사진 몇 장을 간단히 찍고 합류했다. 사람들은 예전에 비해 인부가 넉넉했다. 이장님도 나와서 거들고 있었고 도시에 사는 아들까지 총 11명이다. 아주머니와 손자를 업은 며느리는 참을 내오려고 집에 있으니 현재 이 마을에 사는 농부는 모두 탈곡 현장에 있다.

"통통통" 귀가 먹먹할 정도로 경운기 소리 요란하다. 경운기와 많이 보았던 자동탈곡기를 연결한 벨트가 엇갈려 쉬지 않고 돌고 있다. 그 시절엔 그쪽은 얼씬도 말라던 금지구역이었다.

예전 우리 집에서 내가 했던 방식대로 기본 인원을 헤아려보면 경운기와 탈곡기 주인인 떼어준 벼를 먹이는 사람 1번, 바로 앞에서 가지런히 건네주는 아주머니 2번, 그 앞에서 벼 다발을 풀어주는 사람 3번, 전 단계에서 볏가리 위에 올라 내려주는 아이 4번이 줄줄이 있다.

벨트 반대 편엔 알곡이 쏟아지는 홈 앞에 포대를 끼워놓고 짚 다발을 묶어 던지는 장정 5번, 보조 6번이다. 새참은 아침나절 집에서 나올 때 준비해오는 게 일반적이었으니 예닐곱으로 정신없이 해냈다.

오늘은 2번 앞에 이삭을 추려주며 밀어주는 사람 1명 추가하고 풀어진 끈을 따로 모으는 아주머니 1명에, 컨베이어벨트 끝에서 헝클어지지 않도록 짚더미를 안아서 내려주는 분 1명, 짚단 묶는 이가 2명 더 있고 짚 다발을 쌓는 사람 따로 있으니 체계가 잡혀있을 뿐만 아니라 한결 여유롭다.

줄줄이 서서 펴주면 컨베이어벨트 타고 들어가 손쉽게 벼를 쏟아낸다

a 눈에 보일 정도로 쭉정이와 알골을 선별하여 이렇게 많은 양을 쏟아낸다. 20여 분 지나지 않아 새 부대자루를 준비하니 다른 데를 쳐다볼 틈이 없다.

눈에 보일 정도로 쭉정이와 알골을 선별하여 이렇게 많은 양을 쏟아낸다. 20여 분 지나지 않아 새 부대자루를 준비하니 다른 데를 쳐다볼 틈이 없다. ⓒ 김규환

수십 년간 해오던 일이라 분업체계가 바로 잡혀있으니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같이 간 동행자는 오랜만에 해보는 작업 때문인지 겉도는 모습이 역력했다. 잘 짜인 체제에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보는 게 내 특기 아니던가. 끈 하나를 두 손으로 잡고 있다가 마지막 공정에 합류했다.

얼마간 짚이 쌓이자 들고 있던 끈을 감싸 쥐었다. 내 몸으로 끌어안아 꽁무니를 논바닥에 두 번 탁탁 박아 가지런히 하고 꼭 죄고 나서 끝을 두세 번 돌려 밀어 넣었지만 아저씨들만큼 예쁜 모습은 아니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많이 해본 솜씨요?" 하며 어설픈 내 실력을 감싸주었다. "아이, 잘 안 되네요. 어렸을 때 해보고 오랜만이어서 그런가요?"
"잘 하는데요 뭐."

머리가 희끗희끗하기보다 서리가 하얗게 내려 녹을 줄 모를 성 싶은 노인이 벼 가마를 경운기에 싣고 있다. 젊은 사람이 나서야 일이 수월한 것 아닌가.

한쪽에 가마니가 쌓이면 오가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에 40kg이 조금 넘는 포대를 어깨에 들었다가 옆에 있는 경운기에 올리는 건 내 차지가 되었다. 한 때 아르바이트로 80kg 쌀가마니를 하루 500여 가마 날랐던 경력이 있지 않던가.

a 경운기 동력을 벨트로 자동탈곡기에 연결하여 균형을 잡아주면 일을 척척 해낸다.

경운기 동력을 벨트로 자동탈곡기에 연결하여 균형을 잡아주면 일을 척척 해낸다. ⓒ 김규환

틈이 나는 대로 짚 다발을 옮겨드리고 자리를 잡아간 더미 위에 던져주는 것도 내 몫이었다. 과연 쓸모가 있을까 싶었던 내가 쓰임새가 있다니 다행이었다. 일이라는 게 한쪽이 밀리기 시작하면 여타 공정까지 애로가 쌓여 이쪽저쪽 신경쓰다보면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데 최종 단계에 내가 끼어들어 물꼬를 터주니 막힘이 없이 진행되었다.

조금 여유가 생겨 볏가리를 쌓아둔 쪽으로 가보았다. 이장님은 내려주고 아들은 다발을 풀고 아주머니 두 분이 앞뒤에 나란히 서서 꽁무니와 이삭을 얇고 가지런히 펴주자 왼손 오른손 번갈아 가며 마지막 주자가 착착 밀어 넣는다.

이젠 사람 손을 떠났다. 한 해 동안 해와 바람, 물과 맑은 공기를 마시며 병충해와 싸워온 벼가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남김없이 훑어져 양식이 되고 식량이 된다. 밥이 될 단계에 근접하고 있다.

"들들들" 고속으로 돌고 있는 회전날개에 꽂힌 날카로운 쇠 날에 닿자 "차르르 찰찰찰" 소리도 안쪽으로 숨었다. 컨베이어벨트에 물린 벼가 줄줄이 딸려가며 황금알곡을 털어내고 지푸라기를 옮기고 밀어낸다. 반대쪽에선 10여 분 만에 한가마니를 가득 채운다.

한 때 이 기괴하게 생긴 농기구를 보고 얼마나 신기해했던가. 편리함의 극치였다. 농사도 해볼만 하다고 생각하게끔 했던 자동탈곡기를 실로 20년 만에 다시 보다니. 당시엔 200~300만원이 넘었으나 더 삭기 전에 이웃 동네에서 5만 원에 가져가라는 데엔 세월의 허망함까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새참을 먹으며 담소를 나눈 사이로 발전

a 9시를 조금 넘긴 시각 첫 새참을 내오는 아주머니. 그날은 저녁밥까지 5번을 먹었다. 논일은 밥심으로 한다는 게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9시를 조금 넘긴 시각 첫 새참을 내오는 아주머니. 그날은 저녁밥까지 5번을 먹었다. 논일은 밥심으로 한다는 게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 김규환

주인아주머니는 밥과 따듯한 국물을 새로 만들어 머리에 이고 바삐 마을을 내려오신다. 김치와 밑반찬, 막걸리는 이미 다른 경운기에 실려 있었다. 달달거리던 경운기 시동을 끄고 벨트를 툭 밀어버리고 10시도 안 되었는데 새꺼리(새참)를 먹는단다.

돼지고기볶음, 무생채, 풋배추김치, 풋고추절임, 조기조림, 오이장아찌, 깻잎절임에 따뜻한 밥이 차려졌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술잔을 건네며 두 번째 밥을 먹었다. 예까지 온 것 취하면 재워달라면 되니 농주(農酒)를 마다할 손가. 일하다보면 쉬 깨고 마는 것을.

한사코 이 마을은 예전 방식대로 하느냐고, 불편하지 않으냐고 여쭈었더니 논이 다랑지가 많아서 어찌 손을 쓸 수가 없기도 하고 보조금 보고 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해야만 지붕에 이엉을 올릴 수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농사지을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방법밖에 수가 있겠느냐는데 더 따져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약간 삐틀어진 기계를 손보느라 잠시 시간이 흘렀다. 경운기 대가리와 탈곡기 방향을 잡는다. 탈곡기에 쇠말뚝을 박아 고정하고 시동을 약하게 켰다. 저속으로 돌고 있는 회전판에 벨트를 끼워보니 얼추 맞는지 고속으로 올렸다.

다시 한참을 했다. 볏가리를 쌓아둔 곳보다 짚단이 높아지자 이내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다. 벼농사를 지은들 걱정 건지지만 한 톨이라도 아까워 이삭을 줍고 한번 걸러졌던 쭉정이도 다시 걸러낸다. 애지중지 키워 자식 다음으로 소중하니 허투루 버릴 수 없는 농부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볏가마니를 실어가 말리고 연장을 챙겨 다른 집 논으로 떠났다. 오늘은 탈곡이 두 탕이나 있는 날이다. 한번 마치고 마을을 휘휘 돌아 마을로 들어간 동행자를 찾아 나오니 토란탕에 점심이 차려져 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지만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 후루룩 먹고 조금 늦게 도착해보니 벌써 일이 시작되었다.

팔 걷어 부치고 일손을 덜어주니 또 오라네

a 한 분 일이 다 끝나고 조금 늦게 찾아가니 벌써 이런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 숫자가 줄어 팔을 걷어부치는 수밖에 없었다.

한 분 일이 다 끝나고 조금 늦게 찾아가니 벌써 이런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 숫자가 줄어 팔을 걷어부치는 수밖에 없었다. ⓒ 김규환

오전과 다른 점은 볏단을 따로 쌓아두지 않고 열 대 여섯 다발씩 가지런히 가려놓았다는 것뿐이다. 분량이 적지 않아 여기를 다 마치자면 오늘 하룻밤 신세를 져야할지도 몰라 주위를 배회할 참이었다. 웬걸? 사람 숫자가 현저히 줄어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바람 방향이 제멋대로여서 검불이 사람을 덮치고 있었다.

"용철씨 안 되겠구만. 우리가 좀 거들어야겠소."
"그래요?"
"예, 여기서 빠져나가면 나중에 오는 사람 욕 얻어먹기 딱 좋겠소. 저기 좀 봐요. 나락을 떼어줄 사람과 날라다 줄 사람도 없네. 얼른 갑시다."

손을 잡아끌다시피 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사지로 사람을 몰아넣고 나는 배출구에 포대를 감싸서 묶어 더 길게 빼주고 대막가지를 댔다. 다소 검불이 덜 왔지만 여전히 일꾼들 얼굴에 들이쳤다. 한번 잡은 자리라 바꾸기는 힘든 모양이다.

일반 멥벼와 찰벼가 나뉘어 있었다. 4분의3 정도 되는 일반 벼를 먼저 훑고 있었다. 며칠 내 내린 비가 안쪽에 스며들어 까슬까슬한 맛이 없어 나는 한 무더기를 모두 가져오지 않고 더미마다 돌아다니며 위쪽부터 가져다주었다. 기계 옆에서 옮겨다 풀어주는 김용철씨는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a 긴급 투입된 동행자 김용철씨가 다소 손에 일이 익자 여유를 부리고 있다. 먼지를 뒤집어 써서 동네 우물에서 세수를 하고 나왔다.

긴급 투입된 동행자 김용철씨가 다소 손에 일이 익자 여유를 부리고 있다. 먼지를 뒤집어 써서 동네 우물에서 세수를 하고 나왔다. ⓒ 김규환

어차피 찰벼를 하려면 내부까지 말끔히 치워야 한다. 시동이 꺼지고 네 번째 밥을 먹었다. 논바닥엔 생을 마감한 우렁이가 패총처럼 즐비하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이번에 거든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한 동네 일꾼처럼 친하게 대해줬다.

소싯적 이야기를 풀어내고 이 짚은 오늘 오후에 영광 법성포 사람들이 와서 모두 사간다는 것이다. 콤바인으로 베는 다른 지역 짚은 길이가 짧아 굴비를 엮기가 힘들단다.

일급비밀이라며 알려준 바로는 이렇다.

"진짜 굴비는 엮을 때 지푸라기 네 개를 넣어 같이 엮어야 한답니다. 그 사람들이 벌써 몇 년 째 우리 짚을 사가면서 꼭 몇 통을 주고 가요. 짚이 없으면 다 가짜라고 해요."

참인지 거짓인지 아직 확인은 하지 않았지만 생각 같아서는 굴비를 석쇠에 구워 먹으며 하룻밤 묵을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집 나온 나그네 벌써 사흘 째 아니던가. 아쉬운 작별을 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초가지붕 올릴 때 다시 놀러오겠다고 찰떡같은 약속도 했다.

볏가마니 스무 개 남짓에 짚단을 모두 던져 올리고 2차에서는 볏단을 거의 다 옮겨줬으니 추수 경험 넉넉히 했고 밥도 그 마을에서 세 번이나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으니 할 만큼은 하고 왔다. 다음에 꼭 마을에서 자고가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꽤 성공적이고 소중한 하루였다.

인터넷카페 젊은 회원이 이 마을로 이사 왔다기에 한번 들러서 차나 한잔 얻어먹을 요량으로 마을로 들어섰다. 산이네 엄마와 아빠가 광주에 다녀온 후 마침 댁에 있었다. 다음에 꼭 오마고 짧은 만남을 갖고 축령산 일대를 주름잡는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에서 삼림욕을 즐기고 해질 무렵 길을 나섰다.

허리와 어깨가 뻐근했지만 물을 만난 고기처럼 즐거웠던 하루였다.

a 온종일 짚단과 볏가리 주변 가장 따뜻한 곳만을 골라서 낮잠을 청하는 강아지가 이젠 밉게 보이지 않았다.

온종일 짚단과 볏가리 주변 가장 따뜻한 곳만을 골라서 낮잠을 청하는 강아지가 이젠 밉게 보이지 않았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 원고료는 인터넷고향신문 www.고향i.com 설립에 활용됩니다. 고향에서 보낸 추억과 맛난 어머니 손맛, 꿈에 그리던 내 고향 자랑과 귀향정보, 고향화폐 등으로 꾸며질 고향느낌 풀풀 나는 그 시절 아이들의 놀이터는 이달 말께 선보일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 원고료는 인터넷고향신문 www.고향i.com 설립에 활용됩니다. 고향에서 보낸 추억과 맛난 어머니 손맛, 꿈에 그리던 내 고향 자랑과 귀향정보, 고향화폐 등으로 꾸며질 고향느낌 풀풀 나는 그 시절 아이들의 놀이터는 이달 말께 선보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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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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