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2부 167

좌절

등록 2005.11.07 17:09수정 2005.11.0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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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사신일행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병사들 사이에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장대를 세우고 향피리, 대금, 해금, 장구, 북을 울리며 사신을 영접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은 재인청(才人廳 : 광대를 관할하는 관청)에서 불려 나온 광대들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들더니 장판수와 짱대처럼 멀찍이 앉아 그 광경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거, 이래서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난감하지 않네!"


구경꾼들은 청나라 사신의 행차가 지나갈 곳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장판수는 그들 사이를 마음껏 지나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차충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피리소리가 대금 해금과 어우러져 묘하게 울려 퍼지고 장구 북 소리가 사람들의 어깨를 들썩였다.

비록 전란으로 피폐해진 마당에 청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였지만 오래간만에 구경거리가 생긴 백성들의 신바람까지 사그라지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어깨가 절로 들썩일 때 청의 사신일행은 남별궁 가까이까지 다가 왔다. 난쟁이 광대가 원숭이처럼 붙어 있는 채로 장대가 서서히 세워졌고 광대는 높이 세운 장대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부르며 재주를 보였다.

"어이 좋다 오월이라 꽃 내음 향긋한데 어이하여 우리 님은 기별조차 없으시나. 에헤라 상사디요 귀인되어 오셨구나 에헤라 상사디요 신명나게 노니누나."

사신 일행은 잠시 멈춰 서서 이를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 순간 멀리 있던 장판수가 뛰어 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만 두시오! 그만 두시오!"


깜짝 놀란 짱대가 앞 뒤 가릴 것 없이 뛰어 나가는 장판수를 잡으려 했지만 두 팔은 허공만 휘저었을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장대가 앞으로 넘어지며 그 위에 올라선 난쟁이 광대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사람들 사이로 떨어져 버렸다. 장대를 잡고 있던 자중 하나가 이를 놓아버리고 칼을 뽑아든 채 청나라 사신일행에게로 사납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정명수!"


구경하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청의 호위병들이 신속히 달려와 창을 눕혀 칼을 든 사내를 동시에 찔러대었다.

"으악!"
"억!"

칼을 든 채 달려든 자는 바로 차충량이었다. 뛰어가던 장판수는 이를 말리기는커녕 가까이에도 미치지 못한 채 그만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왜 이러신 것입네까… 왜…."

막상 노렸던 정명수는 옷깃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동시에 차충량은 세 개의 창에 찔린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창이 뽑히자 차충량은 나무토막처럼 앞으로 푹 쓰러져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정명수는 사신 옆에서 차충량의 죽음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져 소리쳤다.

"뭐 하느냐! 어서 사람들을 물리고 남별궁으로 사신을 모셔라!"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장판수는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군졸들이 몰려와 거적에 차충량의 시신을 싸서는 떠 매고 깔 때까지 장판수의 통곡은 그치지 않았다. 그냥 가버릴까 싶었던 짱대는 장판수의 이런 모습을 보고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 갑시다."

짱대가 엎드린 장판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자, 장판수는 눈물을 훔치며 서서히 일어났다. 차충량은 구할 수 없었지만 그 시신만은 거두어 주고 싶었다.

"저…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짱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장판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뒤늦게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남별궁 인근에 병사들이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고 장판수는 차충량의 시신이 떠 매어져 간 곳을 좇아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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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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