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호 변경논란 쓸 데 없다

[주장] 차라리 '서열화' 오해 없게 지정번호 없애야

등록 2005.11.10 18:09수정 2005.11.10 18:31
0
원고료로 응원
국보1호 숭례문. 사진은 지난 5월 27일 숭례문광장 개장행사 모습.
국보1호 숭례문. 사진은 지난 5월 27일 숭례문광장 개장행사 모습.연합뉴스
느닷없이 국보 제1호를 변경해야 한다는 논란이 거세다. 10년 전에도 이러한 논의가 제기되어 실제로 문화재위원회의 검토까지 거친 사안이라는 점에서, 그 시절의 재판인 듯도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 보인다.

무엇보다도 문화재청의 최고책임자가 이 일에 매우 적극적인 편이고, 여기에다 대안으로 부각되는 '훈민정음'의 위세를 앞세우며 여론의 동향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다 보니 논의고 뭐고 없이 이미 변경 쪽으로 결론이 내려진 사안인 듯이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더욱 우려스럽다. 더구나 국보 제1호를 바꿔야 하는 이유가 아무리 봐도 와닿질 않는다. 아닌 말로 공연히 쓸데없는 일에 애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10년 전에는 이 문제가 어떻게 논의되고 매듭지어졌던 것일까?

1996년도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회 제9차 회의록에는 '국보 제1호 재지정' 논란에 대한 검토의견과 토의결과가 수록되어 있다.
1996년도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회 제9차 회의록에는 '국보 제1호 재지정' 논란에 대한 검토의견과 토의결과가 수록되어 있다.

10년만에 반복되는 논쟁

1996년 11월 28일에 개최된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회 제9차 회의록에 보면, 당시의 논의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이것을 살펴보면, 찬성이나 반대 측에서 내세우는 논점과 논리는 지금의 그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안사항: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시 국보 제1호만큼은 대표적, 상징적이어야 하므로 서울 남대문은 재지정하여야 한다는 언론보도 및 국민 일각의 주장이 있어서 이에 대하여 문화재위원 및 전문가의 의견을 조사하고, 전문여론기관인 극동조사연구소에 의뢰하여 일반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재지정여부를 검토하고자 하는 것임.


▲문화재관리국 검토의견: 국보 제1호 서울남대문은 일제가 행정편의에 의해 제1호로 지정한 것으로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사업을 계기로 국보 제1호만큼은 상징적인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문화재를 선정하여 재지정하자는 문화재전문가(38.5%, 52명) 등의 의견도 있으나,

의견조사대상 문화재전문가 및 일반국민 여론조사대상 과반수가 서울 남대문을 현행대로 존속시키자는 반대의견을 제시하고 있고, 국보 제1호의 지정번호는 문화재 가치순서가 아닌 단순한 관리번호이며, 남대문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 건축예술적 가치에도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어 재지정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음.


▲여론조사결과로 드러난 반대이유: 국보 제1호의 번호는 문화재의 가치순서가 아닌 단순한 관리번호이며, 문화재는 그 분야의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가치 때문에 우열을 매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되지 못하고 이미 국민들의 인식 속에 깊이 새겨진 국보 제1호에 대한 관념과 국내외적으로 각종 문헌자료 등의 기록이 정정되어야 하는 등 심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 우려되고, 남대문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 건축 예술적 가치에 특별한 문제가 없어 그대로 유지 보존하는 것이 좋겠음.

▲여론조사결과로 드러난 찬성이유: 국보 제1호는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성이 있어야 하며 국민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세계 어디를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역사적, 문화적 의의가 큰 문화재이어야 하나 남대문은 우리의 대표적 문화재로서 상징성이 부족하고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음.


여기에서 보듯이 그 당시에는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 전신)에서 반대의견을 갖고 있었고,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그 다지 호응도가 높지 않았다. 따라서 결론은 '부결'이었다.

물론 이 당시에 실시된 여론조사의 문제점도 지적될 여지는 있다.

조사 대상자가 전체 국민의 무작위 추출방식이 아니고 "최근 2년 이내 박물관, 사적지 등 문화재를 탐방한 경험이 있는 20세 이상의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다고 표시되어 있다. 내 나름의 추측이지만, 문화재에 대한 식견이나 탐방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문화재 지정번호 자체가 문화재의 가치를 나타내는 표시가 아니라는 점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일반 국민의 국보 제1호 변경에 대한 찬성도가 높지 않았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문화재는 우열을 가려낼 대상이 아니다"

1996년 10월과 11월에 걸쳐 문화재관리국에서 주관하여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보 제1호를 재지정하는 경우 대상문화재로 훈민정음이 가장 많이 추천되었으며, 그 다음으로 석굴암, 팔만대장경, 다보탑, 첨성대의 순으로 나타난 바 있다.
1996년 10월과 11월에 걸쳐 문화재관리국에서 주관하여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보 제1호를 재지정하는 경우 대상문화재로 훈민정음이 가장 많이 추천되었으며, 그 다음으로 석굴암, 팔만대장경, 다보탑, 첨성대의 순으로 나타난 바 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10년 전에 시도된 '국보 제1호 재지정' 논란은 그 결과에 상관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재를 바라보는 중요한 신조 하나를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즉 "문화재는 그 고유한 가치 때문에 우열을 가려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는 관념이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국보의 지정번호가 앞선다고 해서 그것이 여타 문화재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국보 제1호 재지정 논란이 없었다면 이러한 관념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단기간에 학습효과를 가지며 확산되기는 어려웠을 테니 역설적이게도 이건 순전히 국보 제1호 재지정 찬성론자들의 공로인 셈이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이러한 관념은 유효하다. 또한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할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여론의 지지도에 많은 변화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논지는 지금껏 국보 제1호의 변경에 관한 청원이나 질의가 들어올 때마다 문화재청에서 줄곧 내세워왔던 방어논리이기도 했다. 이건 누가 뭐래도 지극히 상식적이며, 자명하고도 타당한 답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국보 제1호가 어떻다느니 하는 논의 자체가 참으로 쓸데없는 짓이라고 얘기했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논점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야말로 문화재를 대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자 도덕률이기도 한 것이다.

'상징성'이 합당한 근거될 수 없다

이번에 국보 제1호를 바꾸자는 주장을 하는 측에서도, "국보지정번호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징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국보 제1호만이라도 고칠 필요가 있다"는 논지로 이 부분만은 애써 피해가려는 것을 봐서도 그러하다.

이걸 잘 아는 사람들이 무리하게 국보 제1호 변경에 관한 논란을 제기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서울 숭례문(즉 남대문)의 모습이다. 남대문 자체가 국보로서의 지정가치가 없다면 모르되, 공연히 국보 제1호의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문화재에 대한 소양부족이자 큰 결례(?)가 아닐까?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서울 숭례문(즉 남대문)의 모습이다. 남대문 자체가 국보로서의 지정가치가 없다면 모르되, 공연히 국보 제1호의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문화재에 대한 소양부족이자 큰 결례(?)가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이것 하나만 고친다는 건 문제가 없는 것일까? '상징성'의 문제를 내세운다고 해서 그것이 합당한 근거가 되기는 하는 것일까?

이것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아 보인다.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이번에 국보 제1호 변경이 성사가 된다면, 그것으로 국보의 '서열화' 개념은 불가피하게 노출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까닭이다. 그것이 아무리 "이번에 딱 한 번으로 그칠" 상징적인 행위에 그친다는 사실을 강조하더라도 말이다.

한번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이러한 논란과 국보 제1호 재변경 문제는 또한 앞으로도 시대정신의 변화, 여론의 동태, 그리고 새로운 유물의 출현 등에 따라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갖게 될 우려가 없지 않다.

"문화재끼리 우열을 가리는 것이 온당치 못하고, 문화재 지정번호가 단순한 관리번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원칙에 조금이라도 동의한다면, 국보 제1호의 '상징성' 운운하는 발상 자체도 거둬들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그럴 정도의 열정과 예산이 있다면, 그 돈과 정성으로 차라리 국보 제1호에 대한 오해와 혼선을 바로 잡아나가는 데 애를 쓰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차라리 국보지정번호를 없애는 게 낫다

그게 아니라면 국보 제1호에 대한 잘못된 관념과 국보의 '서열화'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국보지정번호를 없애버리는 방법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수긍할 만할 대안인지도 모르겠다. 문화재지정 당시의 관리번호는 계속 부여하되, 이것을 문화재 안내문안 등에는 표기하지 않는 것으로서 국보 제1호의 허상을 씻어나갈 필요는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전통과 역사유산을 단 몇 점의 국보가 다 나타낼 수 있을 만큼 우리가 그렇게 폭이 좁고 짧은 역사를 지녔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수천 년을 이어온 다양한 문화생활과 역사유산이 어찌 단 한 점의 국보가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혹여 외국인 누군가가 한국의 국보 제1호가 뭐냐고 묻거든, 우리는 반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세계적인 문화민족이라서 한두 점의 문화재로 다 이해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얘기해주는 것은 어떨까? 그리하여 한국에 머무는 동안 숱한 국보를 하나라도 더 보고 가시라고 말해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은퇴로 소득 줄어 고민이라면 이렇게 사는 것도 방법 은퇴로 소득 줄어 고민이라면 이렇게 사는 것도 방법
  2. 2 남자를 좋아해서, '아빠'는 한국을 떠났다 남자를 좋아해서, '아빠'는 한국을 떠났다
  3. 3 32살 '군포 청년'의 죽음... 대한민국이 참 부끄럽습니다 32살 '군포 청년'의 죽음... 대한민국이 참 부끄럽습니다
  4. 4 소 먹이의 정체... 헌옷수거함에 들어간 옷들이 왜? 소 먹이의 정체... 헌옷수거함에 들어간 옷들이 왜?
  5. 5 관광객 늘리기 위해 이렇게까지? 제주 사람들이 달라졌다 관광객 늘리기 위해 이렇게까지? 제주 사람들이 달라졌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