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의 역사적 유래가 없는 서대문이 사라지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입성한 남대문과 동대문은 그러한 유래가 있어서 파괴를 모면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남대문과 동대문의 보존가치를 그렇게만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논리이며, 사실관계에도 잘 부합되지 않는 발상이다.
그렇다면 남대문이 곧 왜군이 입성한 역사적 기념물이라서 그러한 이유로 보물 제1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논점은 어느 정도 타당하며, 사실관계는 또 어떠할까?
이러한 얘기는 지난 2002년에 일본인 유학생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가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에 제출한 석사학위논문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고적조사와 성곽정책>에 수록된 데서 비롯되었는데, 요약하자면 이러한 것이다.
...1905년 무렵에 한국주차군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교통에 불편하다고 하여 대포를 동원하여 남대문을 파괴할 생각을 갖자 이를 우려한 당시의 거류민장 나카이 키타로(中井喜太郞)라는 사람이 말하길, "예전에 가토 키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이며, 당시의 건축물은 남대문 외 두, 세 가지밖에 없는데, 파괴하면 아깝지 않습니까" 하였더니, 하세가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파괴를 모면하였다...
오타가 정리한 논지에 따르면, 여기에서 보듯이 남대문, 동대문은 모두 임진왜란 때 왜군이 입성한 역사적 유래를 지닌 곳이라서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었으며, 이와는 반대로 아무런 유래가 없었던 '서대문'은 파괴되는 처지에 이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남대문과 동대문이 보물로 지정되는 것으로 그대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이 얘기는 내용 자체가 좀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논지가 아주 단순명료하여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으며, 특히 언론매체를 통해 여러 번 소개된 적도 있었는데, 그 후로 이것이 국보 제1호를 교체해야 하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있음은 참으로 새삼스러운 현상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에는 다소간 사실관계에 맞는 부분도 있을 테지만, 상당수는 과장된 해석이라고 판단된다. 남대문이 파괴를 면한 것에 나카이의 공헌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전부를 설명하려는 것은 매우 지나친 일이며 사실관계에도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05년 무렵에 일본공사관을 통해 제기된 성벽철거계획은 대한제국정부에 의해 묵살된 사실이 있고, 그 후 성벽의 철거가 현실화되는 것은 1907년에 가서야 이뤄지는 까닭에 나카이가 제기한 보존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서대문이 사라진 것이 왜군과 관련된 역사적 유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역시 공인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이곳은 도로확장에 따른 공간부족에다 언덕에 자리한 지형특성과 단층 문루라는 조건 등이 감안된 결과이지, 전적으로 그 이유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반대로 남대문이나 동대문의 보존가치 역시 반드시 일본과의 관련성 여부에 따랐다기보다는, 그것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복층구조를 지닌 우수한 건축물인데다 우회도로의 건설이 가능한 공간구조라는 조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남대문과 동대문의 건축역사적 가치와 의미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같은 건축사학자에 의해서 이미 충분히 인지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일제도 한때 남대문 철거 검토
그런데 사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왜군이 입성한 '남대문'이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늘 보존의 우선순위로 꼽혔다거나 그다지 세심한 배려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는 점은 금세 드러난다. 따라서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그것만으로 아주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한다.
가령 <동아일보> 1926년 7월 4일자에는 "도시계(都市係) 사카이 기사(酒井 技師), 남대문철훼계획(南大門撤毁計劃), 일반교통에 장해가 된다고"라는 제목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