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냄새에 마음이 쿵쾅쿵쾅 거리네

[서평] 꼴까닥 침넘어가는 고향이야기 가득한 박형진의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등록 2005.11.13 16:02수정 2005.11.13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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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 ⓒ 소나무

책장 사이사이에서,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알싸한 음식냄새가 풍겨온다. 화학 원료들로 범범한 음식이 풍길 수 있는 냄새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는, 푸르른 고향땅에서만 얻을 수 있는 향토박이 음식들의 향내가 솔솔 풍겨온다. 박형진의 고향이야기가 담긴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에는 그것이 담겨있다. 자간 사이에 그리운 고향의 향기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향의 음식 냄새가 푸짐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운 고향땅, 그곳에서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던 동네형님들과 누님들, 그리고 어르신들과 한데 앉아 보글보글 소리를 내는 찌개를 곁에 두고 이야기꽃으로 날밤 새는지도 모르던 때가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진귀한 것이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리가 누리던 평범한 하루의 모습이었다. 몇 십 년이 무엇인가? 몇 년 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나절 푹 삶은 콩을 지푸락 펴고 시루에 담아 따뜻한 아랫목에 한 삼 일 띄우면 쿰쿰한 냄새와 함께 끈적끈적한 실이 느른하게 빠지는데 여기에 알맞은 소금간과 고추 갈아 놓은 것, 마늘 까놓은 것을 함께 넣고 찧는다. 이 때 덜 찧어서 반토막난 콩이 좀 섞여 있어야 그놈 깨물어 먹는 맛이 좋지, 얌전 낸다고 박박 찧어내면 힘은 힘대로 들고 맛은 맛대로 없다. 마늘 고추 소금간이 되어 있으니 끓일 때 두어 수저 떠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데 아무리 적게 해도 이웃집에 한 대접 돌리지 않는 법이 없었다." '본문' 중에서

그러나 세상이 도시화되고 맹목적으로 도시가 살만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이런 광경은 과거의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농촌을 떠나는 현실에서, 이웃의 얼굴도 모르는 도시에 사는 현실에서 사람들과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던 고향이야기는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고향이란 무엇인가? 명절 때나 한번 돌아봄직한 그것이 되고 말았다.

소설이든 수필이든 간에 글 또한 마찬가지다. 작가들 중에 고향의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이가 누가 있던가? 또한 표현한다 하더라도 현재를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이가 누가 있던가? 관심을 둔 이들 모두 과거를 추억할 뿐이다. 회한에 사로잡혀 홀로 넋두리에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박형진은 다르다. 그는 오늘의 고향이야기에 충실하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해도 현재에 충실하려고 애쓴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은 부담이 없다. 그렇기에 고향이 없다고 불리는, 도시에 태어나서 도시에서 살아난 젊은 세대들도 어렵지 않게 흠뻑 빠져들 수 있는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풍경에 몸을 두지 못했던 이들까지도 흠뻑 빠져들게 만드는 그 풍경에는 무엇이 있는가? 음식이 있다. 맛깔스러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게 맛난 고향의 음식이 있다. 물론 그 음식들은 도시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계절에 상관없이 어떤 과일이든 즉시 구할 수 있는 도시에서 고향의 음식을 어찌 구하지 못하겠는가? 허나 수준이 다르다. 고향의 음식은 고향의 풍경 안에서 음미해야만 제 맛이 살아난다.


"지금처럼 회를 탐하지 않던 때라 몸뚱이는 토막쳐서 단지에다가 독간을 해 놓고 맛있는 대가리, 창자, 꼬랑댕이만 한 솥을 끓인다. 얼큰하게 끓이면 매운탕이고 미역 넣고 끓이면 농어 미역국이 된다. 마당에 덕석 내다 펴고 땀 뻘뻘 흘리며 모두 다 한 그릇씩 먹던 그 기름 누우런 농어 미역국을 지금은 농어가 비싸서인지 잊어서인지 해먹는 사람이 없다. 그렇게 끓인 농어국은 맛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긴 창자가 특히 더 맛이 있었다. 다른 고기 창자와는 달리 아주 한 발이나 됨직한 창자가 속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기름이 버걱거리며 고소하기만 해서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본문'중에서

고향의 풍경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과 가쁘지 않은 시간과 어디를 둘러보나 마음을 위로해주는 동무 같은 산골 모습이 그것이다. 그것들이 함께해야 맛이 제대로 살아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풍경을 아름답게 만다는 것은 토속적인 언어의 노래, 즉 사투리가 있어야 한다. 하나의 노래와 같은 그것, 구수한 사투리가 빠진다면 고향은 고향이 아니다.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돗자리 위에 옹기종기 엉덩이 깔고 앉아 표준어로 대화하며 배추쌈 먹는 광경을. 상상하기 싫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에는 그것이 있다. 고향의 음식, 어머니의 따뜻함, 동네 주민들의 넉넉한 마음씨, 구수한 사투리, 싸움조차 정다워 보이는 공동체의 유대관계까지 없는 게 없다. 모두 다 있다. 그렇기에 책에서 고향의 알싸한 음식냄새가 풍겨온다고 할 수 있는 게다. 고향에서만 볼 수 있는 그 냄새가 자간 사이마다 가득 배어있다.

"멸치 뒤를 따라오는 것 중에 특히 갈치는 뺄 수가 없다. 애들 손바닥 같은 풀치야 갈치라고 할 수 없으나 그도 많이 잡히면 풀치젓을 몇 동이씩 담그던지 엮거리를 엮지만 배에서 평생 그물을 당기는 뱃사람들의 그 두툼한 손바닥 같은 갈치는 하얗게 번뜩이는 비늘을 대충 긁어 버리고 밭에서 막 따온 서리 호박과 함께 얼큰하게 지져 놓으면 그 쌈박한 맛은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다." '본문'중에서

꼴까닥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고향의 음식 냄새를 맡은 몸이 덤벙대며 꼴까닥 소리를 만든다. 가슴이 쿵쾅쿵쾅 거리며 방망이질을 한다. 고향의 풍경, 간만에 그것을 보자 어머니의 따뜻한 품과 아버지의 넉넉한 마음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제가 고향을 찾은 듯 설렘에 쿵쾅쿵쾅 거린다.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한권의 책이 어찌 이리도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을 수 있을까? 고향을 이야기하기에 그러할 테다. 애정 가득한 마음씨로 똘똘 뭉친 박형진이 모두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아련하게 자리 잡은 그것을 살금살금 건드리기에 그러할 테다. 또한 잊고 있던 그것, 시냇물로 돌을 퐁당퐁당 던지며 깔깔 웃던 그 즐거움을 되새기게 만들기에 그러할 테다.

고향의 마음씨 같은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잊어버린 과거와 냉랭한 오늘날을 따스하게 위로해준다. 나아가 얼음장 같이 차가운 내일까지 위로해주니 더할 나위 없이 반갑다. 콧등이 시큰거릴 정도로 반가운 그것, 그것이 여기에 있다.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에 그것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 꼴까닥 침 넘어가는 고향이야기

박형진 지음,
소나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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