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꾸미를 부탁해~!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등록 2005.11.14 11:41수정 2005.11.1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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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표지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표지 ⓒ 소나무

난처했다. 한 선배가 어떠냐고 내민 책을 척 보니까 대번에 그랬다. 못 먹고 못 살던 날의 60년대, 그 고향 이야기라니. 이런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마누라 빼고는 다 새것으로 갈아치우는 것만이 살길이라 목숨을 걸고 폐기처분한, 어서 잊어버리고만 싶을 한 세대 전의 낡고 낡은 이야기를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이미 10년 전에 '내일을 여는 책'에서 <호박국에 밥말아 먹고 바다에 나가 별을 헤던>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초판으로 그만 묻혀버린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이놈의 글이 하도 희한해서 잘라 읽을 수가 없었다. 단숨에 읽게 되는 책이 간혹 있지만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서 못 견디게 하는 그런 유혹과는 다른 것이었다.

문장마다 쏟아지는 질펀한 사투리 사태는 이문구 선생의 <관촌수필>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와는 다르고, 자연과 노동과 놀이와 삶에 대한 성찰은 전우익 선생의 글을 떠올리게도 했지만 그것과도 또 달랐다.

어쨌거나 이 이상한 매력에 홀려 지나간 과거를 덮고(?) 과감하게 출간을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발을 빠뜨리고 나자 처음 느낀 이상야릇한 느낌의 정체는 곧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은이 박형진은 시인이다. 1994년에 <창비>로 등단해 <바구니 속 감자 싹은 시들어 가고>(1994 창비), <다시 들판에 서서>(2001 당그래), 두 권의 시집을 내고, <모항 막걸리집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2003 디새집)란 산문집도 냈다. 이력이 이쯤 가면 폼으로 농사 깨작거리며 글 써먹고 사는 사람이거니 할지도 모르겠다(사실 그가 낸 책은 죄다 잘 안 팔려서 글로 먹고살래야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그는 태어난 그 땅에서 농사지어 먹고사는 애오라지 변산 모항사람이며, 중학교 1학년 다니다 말아버린 게 학교 공부의 끝이다. 그랬다! 그는 고향을 등지고 떠나오지도 않았고 학교에서 새겨 넣어 주는 보잘것없는 지식에 휘둘리지도 않았다.


이제껏 고향을 그리는 글이란 글은 죄다 고향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사라진 과거를 그리는 향수이거나 한숨이지 않았는가. 하지만 박형진에게 60년대의 고향은 지금, 현재와 맞닿은 현실이다. 그러니 철따라 해먹던 온갖 음식 만드는 방법이며 같이 서리해먹던 동무들 이름, 누구네 어머니 바람난 사연, 술만 자시면 쌈판을 벌이던 동네 사네들 이력까지 시시콜콜 죄다 읊어대는 것이다(처음엔 박형진 시인의 이 소름끼치는 기억력에 놀란 나머지 천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도 그럴 수 없이 익살맞게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어디서 배운 적 없는 글을 그 사는 모양새대로 술술 잘도 써내리는 것이다. 글을 먼저 읽고 시인을 나중에 만났을 때 나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우스워서가 아니라 글하고 똑같이 말하는 걸 들으며 '아, 말하는 대로 쓴 글이구나' 반갑고 반가워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옛글을 다듬고 새글을 보태어 글을 좀 다르게 묶어보니 한결 읽기가 좋았다. 그 뜻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짙은 사투리는 어떻게 해야겠는데, 괄호에 넣자니 볼썽사납기도 하고 읽기도 거북했다. 그래 양쪽 여백에다가 설명을 세로로 달았는데 보기에 어떤지 모르겠다.

마지막까지 제목 때문에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다가 마침내 책 한 권이 세상에 떡- 하니 태어났다. 출판사로서는 물론 이 녀석 출생신고도 하고 인사도 다니며 살 길을 열심히 터줘야 하지만 일단 한번 내놓으면 어디로 다니며 무슨 짓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이제 제 살 길은 제가 열어야 하는 것이다. 열두 고개 고개 넘어 시집간 딸이 궁금하고 걱정스러워도 잘 살겠지, 잘 살겠지 자꾸 믿어보는 애미 애비 마음으로 말이다.

혹여 변산바다 쭈꾸미를 만나시거든 제 안부 좀 전해 주시길.

a 변산 모항.

변산 모항. ⓒ 김홍모

덧붙이는 글 | 이혜영 기자는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을 펴낸 소나무출판사 편집자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혜영 기자는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을 펴낸 소나무출판사 편집자입니다.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 꼴까닥 침 넘어가는 고향이야기

박형진 지음,
소나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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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 14년차, 제주도 농경사회 공부하며 기록하는 작가. '세대를 잇는 기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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