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막이'에 실낱같던 끈을 놓으신 어머니

미신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서럽게 살다간 어머니 제사를 앞두고

등록 2005.11.15 16:52수정 2005.11.1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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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과 ‘살맞았다’의 정체


‘혼불’은 이제나 저제나 사람들 애간장을 끊어놓고 죽음 앞에 선 사람의 영혼이 불빛이 되어 날아가는 것을 말한다. 남자는 몽당 빗자루, 여자는 접시 모양이라고 한다. 내가 본 것은 빗자루 모양뿐이었다.

으스름한 해름이나 해가 진 다음에 죽음을 앞둔 집안에서 마을 앞 내를 건너 도깨비불처럼 휘익 눈깜짝할 새 날 듯 지나가 2~300미터 앞에 형체도 없이 떨어진다. 다음날이나 이틀 후에는 반드시 곡 소리가 났고 집집마다 빨래를 걷고는 초상을 치르게 된다.

비과학적이니 어쩌니 의견이 분분할 수 있으나 소위 ‘불나갔다’는 ‘혼불’은 곧 사람 몸에 끊임없이 흐르던 기(氣)가 정체 또는 뭉쳐서 육신을 떠나는 과정이다. 자연과학 이론에 의하면 인(燐)이 분리되는 현상이니 결코 헛된 망상이거나 허황된 불빛이 아니다.

호상(好喪)이라면 누구 것인지 확실하거니와 속으론 혼불을 반기는 이도 있었다. 참상(慘喪)일 경우엔 염라대왕이 누구를 데려갈지 몰라 며칠 간 동네에선 그 주인공이 누굴까 의견이 엇갈리지만 누구라고 거론했다간 뭇매를 맞을 일이다. 하지만 단골내도 맞추지 못하니 불안에 휩싸이기도 했다.

또 흔히 ‘살이 끼었다’거나 ‘급살 맞았다’는 말이 있다. 살(煞)은 악귀의 못된 짓으로 사람이 병마에 시달리다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남의 상여 나가는 것을 보고 살을 맞을 때는 상여살(喪輿煞), 산(山) 기운에 견디기 힘들어 갑자기 전혀 딴사람이 될 때는 산살(山煞), 터를 주관하는 신에 밉보였다가는 기살(基煞)을 맞게 된다.


호상이 아닌 경우라면 살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어린아이나 젊은 축에 드는 사람이 원인모를 병마에 시달리면 내 고향에선 ‘주장막이’ 또는 ‘주장맥이’를 한다. 액(厄)은 곧 재앙이니 이를 막고자 액땜이나 액막이, 살풀이를 하지 않으면 잡귀 잡신이 어찌 해칠지를 모른다. <액맥이타령>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주장막이’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80년대 초반까지 깨어나지 않던 금기와 미신


조선 양반사회에 양반 체통을 지키라며 하지 말라던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 대목이 꽤 길지만 한번 보기로 하자. 몇 가지나 지킬 수 있는지 금지목록을 만들어 하루를 살아보면 어떨까.

(중략)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뎌 입으로 설궁(說窮)을 하지 아니하되, 고치탄뇌(叩齒彈腦)를 하며 입안에서 침을 가늘게 내뿜어 연진(嚥津)을 한다. 소맷자락으로 모자를 쓸어서 먼지를 털어 물결무늬가 생겨나게 하고, 세수할 때 주먹을 비비지 말고, 양치질해서 입내를 내지 말고, 소리를 길게 뽑아서 여종을 부르며, 걸음을 느릿느릿 옮겨 신발을 땅에 끈다.

고문진보(古文眞寶), 당시품휘(唐詩品彙)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자를 쓰며,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맨상투로 밥상에 앉지 말고, 국을 먼저 훌쩍 훌쩍 떠먹지 말고, 무엇을 후루루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를 찧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막걸리를 들이켠 다음 수염을 쭈욱 빨지 말고, 담배를 피울 때 볼에 우물이 파이게 하지 말고, 화난다고 처를 두들기지 말고, 성내서 그릇을 내던지지 말고,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말고, 노복(奴僕)들을 야단쳐 죽이지 말고, 마소를 꾸짖되 그 판 주인까지 욕하지 말고, 아파도 무당을 부르지 말고, 제사 지낼 때 중을 청해다 재(齋)를 드리지 말고, 추워도 화로에 불을 쬐지 말고, 말할 때 이 사이로 침을 흘리지 말고, 소 잡는 일을 말고, 돈을 가지고 놀음을 말 것이다.(후략)


몇 가지는 아직도 유효하지만 거개가 양반사회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조선후기로 갈수록 상류사회가 헤어날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 서민사회도 미신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금기의 시대에 방안, 부엌, 마당, 헛간 등 집안 곳곳에 잠복한 잡귀, 잡신이 도사리고 있었다.

밤엔 귀신 나온다며 휘파람도 불지 말라고 했다. 아침엔 재수대가리 없다며 더 불지 못하도록 했다. 낮엔 뱀 나온다고 했다. 그러니 언제 한번 맘껏 휘파람을 불 수 있었겠는가. 이뿐인가. 신발이나 솥단지 밑창을 닦으면 누가 죽는단다. 몸에 마른 때를 벗기면 집안 어른이 돌아가신다고도 했고 문지방을 밟으면 재수가 없다고 했다.

밤에는 머리도 감을 수 없고 빗질도 못하게 했다. 거울을 보는 것도 금지시켰다. 아침엔 아녀자들이 이웃집 방문을 못하게도 했다. 손톱을 깎아 아궁이에 버리거나 마늘껍질을 불에 태우면 혼이 나기도 했다.

그릇을 쇳소리가 나게 긁으면 복달아난다고도 했다. 밤에 아이 이름을 부르거나 얼굴에 쓰면 귀신이 데려간단다. 그뿐이 아니다. 낮 거미를 죽이면 귀한 손님을 죽이니 그냥 두라고 했다. 갓난아이를 업고 무겁다고 하지 말라니!

우리 집 부적은 아직 문설주 앞 양쪽에 걸쳐진 엄나무가시 방 안에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주장막이가 펼쳐질 때 나도 뒤를 따랐다

1982년 11월 초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에 내가 본 마지막 ‘주장맥이’가 펼쳐졌다. 영험하다는 단골로 등장하는 무당이 불려오지도 않았다. 마당엔 멍석이 깔려 있고 솜이불 한 채를 꺼내서 차가운 그 위에 깔아놓았다. 절구통과 절구공이도 준비가 되었다.

동네에서 조심조심 사람들이 몰려왔다. 병원에 있던 마흔아홉 환자에게 가망이 없다고 하자 실낱같던 희망의 끈을 잡고자 잠시 데려왔다. 굿과 점을 철천지원수 같다며 멀쩡하던 여인이 미신(迷信)을 버리고 개종하여 기독교에 몸을 의탁한 지 4년째였다. 미신은 그렇듯 죽음 앞에선 그 여인 발목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휭휭 부는데 환자를 안아서 멍석에 뉘이고 이불을 대충 덮었다. 절구는 멍석 옆에 누워 있다. 징 하나만 예닐곱 명의 대열을 이끌 뿐 다른 악기는 동원되지 않았다. 징을 느린 가락으로 치자 뒤따르며 빙빙 돌던 사람들은 절구공이와 작대기, 쇠스랑, 대빗자루 따위로 땅 바닥과 절구통을 콩콩 찧었다가 환자를 덮은 이불을 짓누른다. 작대기와 쇠스랑으론 이불을 들썩거린다.

어린 나는 그걸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여동생과 아버지도 뒤를 따랐다. ‘제발 낫게 해주세요.’ ‘우리 엄마는 절대 먼저 가실 분이 아니어요.’ ‘우리 엄마를 데려가시면 안 됩니다. 몇 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듯 빌었다. 급기야 내 입가엔 ‘하느님, 어머니처럼 착한 사람을 데려가시면 영원히 저주할 겁니다’는 말이 맴돌았다.

열댓 바퀴를 돌고나서는 속도가 꽤 빨라졌다. 마치 아프리카 흑인들이 제를 올리듯 함성을 질러가며 열기를 올렸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지신(地神)과 살을 누르기 위해 어찌나 드세게 돌던지 살얼음이 언 감나무 아래 마당이 녹아서 질컥거렸다.

가끔 방향만 전환할 뿐 10여 분 똑같은 동작으로 잡귀를 몰아붙였다. 성한 사람들 입에선 입김이 솔솔 피어오른다. 징소리가 잦아들자 급히 어머니를 안고 방안으로 들여가 이불 속에 파묻듯 모시고 나서 군불을 몇 배나 땠는지 모른다.

옆에서 지켜본 나는 어머니 숨소리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았다. 오들오들 떨며 이를 부딪치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오한이 들던지 신음소리도 끊이질 않았다. 솥에서 뜨거운 물을 떠다가 어머니께 드려도 차도가 없었다. 더 악화가 될 뿐이었다.

주장막이의 맹점이 몇 가지 있다. 아파서 곧 죽을 사람 의견 물어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마지막 끈을 잡기 위해 결정하는 주장막이는 환자 의견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구나 주장막이를 하는 동안 좀 따뜻하게 해서 차가운 이불 안에 있는 사람에게 소름이 끼치지 않을 정도로 아늑하게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어머니가 떠난 후

그렇게 어머니와 나는 살아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주장막이를 하기 전에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해주신다며 세상의 모든 힘을 다 모아 군불을 때며 어머니는 힘없이 말씀하셨다. 내게 물려주지 말아야 할 유언을 남기고 있는 중이다. 유일한 증언자라 온몸이 떨렸지만 애써 불 옆으로 가서 꼼꼼히 들어야 했다.

“니 애비만 안 보면 원이 없겠다. 몸써리가 나.”
“엄마 왜 그래?”
“아무래도 오래 못 살랑갑다.”
“얼렁 나사각고 와야제 뭔 말이여?”

활활 타오르는 불을 밀어 넣으면서 아버지가 없으니 온몸을 만지작거리며 맘 놓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직도 니 엄니 어깨가 시큰거린다. 왜 근지 아냐? 저기 말래(마루) 도치(도끼) 태죽(자국) 보이쟈?”
“응.”

이유 없이 쫓겨났던 나날이었다. 허구한 날 술만 드시면 집안 살림은 온전히 있던 날이 없었다. 장독대도 물론이거니와 솥단지와 물동이 등 밥 해 먹고 사는 기본 밑천까지도 두들겨 깨버리는 통에 어머니와 우리들 가슴에도 피멍이 들었다. 웬 자국인가 했더니 이제 그 내력을 말씀하시려나 보다.

“너도 알지만 시도 때도 없이 볶았다. 술만 먹으면 짐승이 되더만 이 집으로 이사 온 뒤로는 더 했어야. 어느 날엔 도끼를 들어 니 엄니를 찍더라. 고것이 어깨를 찍고 말래를 친께 패인 것이여.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젖 몽우리가 생겨 이미 가슴 한쪽을 도려냈고 팔은 탱탱 부었다. 농약통을 날이면 날마다 지고 농약을 뿌려댔기 때문에 중금속 오염도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망이 없었기에 그날 밤 주장막이를 하는 것 아닌가.

원이 쌓인 것이다. 한이 된 모양이다. 묵묵히 아들딸만을 생각하며 저주받을 남편과 집안에서 긴 세월을 모조리 떠안으며 살고 있을 뿐이었다. 나마저 사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어서 커서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떠나가는 마당에도 도저히 풀리지 않을 관계를 나를 통해 전달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도 앞길이 창창한 중학생에게 말이다. 적개심이 어두운 부엌을 감쌌지만 오로지 어머니가 어서 낫기만을 바랐다.

“엄마, 괜찮아질 거야. 시방 엄니 나이가 마흔 아홉밖에 안되잖어. 막내아들이랑 막둥이딸이 커서 호강시켜드릴 때까지는 살아야제. 엄마 없으면 우린 어쩌라고?”
“글도 사람은 다 사는 것이여. 형제들 간에 우애 있게 살아야 헌다. 알았제?”

설움이 복받쳤다.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불쌍한 어머니다. 번번이 도저히 살 수 없다던 어머니를 왜 외할머니는 ‘작은 각시라도 얻어 줄 테니 데리고만 있으라’고 했을까. 영민하신 할머니가 이런 꼴을 보고 싶었던 걸까.

이제 막 재기를 꿈꾸던 집안이 폭삭 망할 징조가 보였다. 최근 몇 년간 애어른 할 것 없이 열심히 일해서 논마지기를 착착 늘려갔던 집안에 드리운 망조라니.

굿을 하고나자 밤새 끙끙 앓더니 하루 잠시 머물고 다시 어머니는 광주에 있는 큰 병원으로 다시 가셨다.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자식과 사랑하는 자녀 줄줄이 남겨두고 시월 보름날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곧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이제 두 분 중 한 분만 남았으니 아버지 마음과 몸을 추스르도록 돕는 게 도리라 생각하고 떠나간 어머니껜 죽을 죄를 지을 각오를 하고 어린 자식들은 새어머니를 모시려고 내리 3년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그 뒤로 간간히 다니던 교회와 영영 담을 쌓았다. 세월이 되어 이제 어머니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매년 11월이 되면 왜 이리 스산하고 침울한지 모르겠다. 어머니 생각 때문인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유는 한 집안의 고단한 슬픔을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니 다른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다만, 아래 관련글까지 검토 후 소설에 재주가 있는 분이 소재로 써도 무방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유는 한 집안의 고단한 슬픔을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니 다른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다만, 아래 관련글까지 검토 후 소설에 재주가 있는 분이 소재로 써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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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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