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 한 오라기의 혁명, 청국장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102] 수확한 콩 청국장 만들어 찌개 끓였네

등록 2005.12.19 09:38수정 2005.12.1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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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생각 외로 잘 뜬 청국장. 이왕 띄울 때 냄새가 팍 나도록 띄우자.

생각 외로 잘 뜬 청국장. 이왕 띄울 때 냄새가 팍 나도록 띄우자. ⓒ sigoli 고향

얼마 전 찾아간 전남 무안에서 들은 이야기다.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평소 얼굴에 기미와 주근깨가 범벅이 되어 시커먼 아주머니를 얼마 지난 후 다시 만났더니 얼굴이 하얀 분을 바른 것처럼 번지르르 하고 뽀얗게 변했다고 한다.


대체 무슨 비결이라도 있을까 궁금하여 "자네 뭐 발랐는가?" 물었더니 "성님, 무슨 말씀이오? 나 아무 것도 바르지 않고 그냥 나왔당게" 하더란다. 재차 물었더니 "청국장 가루를 요구르트에 타서 먹었을 뿐이여"라고 하더란다.

석 달 동안 음료수 마시듯 흔히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하는 청국장 하나로 그런 효과를 볼 수 있을까? 일정이 바빠 직접 그 아주머니를 뵙지 못하고 온 것이 후회스럽다. 동네 사람들끼리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니 믿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여간 궁금하지가 않다. 직접 '실험'을 해 볼까도 싶다.

a 도시에서 가마솥에 콩을 삶기는 쉽지 않지만 옛맛을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일부를 퍼서 청국장을 만들었다.

도시에서 가마솥에 콩을 삶기는 쉽지 않지만 옛맛을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일부를 퍼서 청국장을 만들었다. ⓒ sigoli 고향

몇 해 전까지 쳐다보지도 않던 발효 식품이 요즘 뜨고 있다. 생김치보다 묵은지가 더 인기고 된장, 고추장, 장아찌, 젓갈에 홍어와 생선을 띄운 식해가 다시 생활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다 보니 구린 냄새 지독하지만 20대 후반이 되면 자연스레 찾게 되는 마력을 지녔다.

대여섯 해 전에는 몸은 둘째 치고 옷에까지 냄새가 배는 탓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청국장이 자리잡더니 3년 전쯤부터는 홍어가 인터넷과 방송 물결을 타고 삼천리방방곡곡 터를 잡았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어떤 이는 땅 속에 파묻은 묵은 김치를 맛보고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것 한 가닥 쭉 찢어서 먹으면 다시 살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밀려온다니까요"라며 최고의 찬사를 늘어놓았다.


혐오식품이나 다름없던 발효식품이 이제야 올바른 대접을 받는 게 단순히 시류가 아니라 음식 문화를 재조명하고 건강 식단을 차리기 위한 본 궤도에 오른 것 같아 토속음식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 온 한 사람으로 뿌듯하기까지 하다.

a 질시루가 제격이나 잇몸으로 한다는 생각에 헌 바구니를 써봤다. 짚을 뭉치고 위에 또 덮었다.

질시루가 제격이나 잇몸으로 한다는 생각에 헌 바구니를 써봤다. 짚을 뭉치고 위에 또 덮었다. ⓒ sigoli 고향

'신토불이'를 외치지 않아도, 굳이 한국적인 것을 들먹이지 않아도 건강식품으로 최고의 경지에 올라 반도체나 자동차, 휴대폰 등 소위 해외로 잘 나가는 공산품보다 더 경쟁력 있는 발효식품이 마침내 세계음식문화를 주름잡을 날만을 간절히 바라는 내 바람이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은 시간이 해결할 문제라고 본다.


그 중 이 나라에서 나고 여기서 수십 년 살았던 사람마저 먹기를 꺼려하는 음식 두 가지를 고르라면 단연 홍어와 청국장이다. 홍어에 대한 이야기는 누차 해왔던 터라 오늘은 고약하기 짝이 없는 청국장이 주인공이다. 한반도에서부터 만주 벌판까지가 원산지인 콩으로 만드는 청국장(淸麴醬)!

a 솥뚜껑을 덮고 신주단지 모시듯 아랫목에 이틀 동안 묻어뒀다.

솥뚜껑을 덮고 신주단지 모시듯 아랫목에 이틀 동안 묻어뒀다. ⓒ sigoli 고향

누룩곰팡이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하루쯤 콩을 잘 불려 푹 삶아서 60도까지 식히고 40~45도 정도가 유지되게 이불을 싸매고 또 하루만 묻어두면 이게 퇴비인지 모르게 팍 삭아 버린다. 맘만 먹으면 바로 해먹을 수 있으니 인스턴트 식품치고 별로 손이 가지 않지만 구린내가 보통이 아니다.

여기에도 비결이 있다. 물이 오염되지 않아야 하고 새로 지은 아파트에서는 잘 뜨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국장균은 공기 중에도 많지만 지푸라기 한 올을 만나면 혁명적 변화를 겪어 거무스름하게 뜨고 그걸 퍼서 옮기려면 비단결보다 더 가느다란 실을 수도 없이 뽑아낸다. 끈적끈적하기 이를 데 없다. 국자에 달라 붙어 이내 생겼다가 그냥 두면 금세 사라지고 만다.

내겐 올해 전남 장성에서 벼를 탈곡해 주고 얻어온 짚 두 다발이 있다. 집안은 이사 온 지 4년이 다 되었지만 도배 한 번 바꾸지 않은 헌 집이다. 마침 지푸라기도 손으로 직접 베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 자체다. 큰 맘 먹고 메주 쑤는 날 시도해 보기로 했다.

a 끈적끈적한 실이 한올 한올 나오자 그제서야 잘 되었다고 안심했다.

끈적끈적한 실이 한올 한올 나오자 그제서야 잘 되었다고 안심했다. ⓒ sigoli 고향

한 말 가웃을 불리고 가마솥을 가스레인지 화력으로는 모자라 옆에 보조 불을 덧대고 기억을 되살려 삶았다. 차차 밤이 깊어갔다. 다섯 시간을 삶았더니 드디어 잘 물러지게 콩이 익었다. 구수한 단백질 냄새가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문을 비집고 스멀스멀 기어들어갔다.

예전에 어머니는 콩 타작을 마치면 메주를 쑤기 전에 해마다 콩 한 되를 삶아 청국장을 띄우셨다. 매매한 고랫재보다도 아니 쩐 황토집 냄새보다도 그윽하다 못해 코를 막고 싶은 아련한 맛이 생각나 후환을 무릅쓰고 도전했다.

청국장 질시루에 담요를 덮고 볼 때마다 두 손 모아 절까지 하는 장모님을 따를 수는 없지만 정성과 조건을 충족 시켜 주면 되는 것 아닌가. 시루 대용으로 헌 소쿠리에 진물이 흐르지 않도록 식혀서 깔고 푹 파묻었다. 이왕 냄새를 풍기는 것 맘껏 뜨라고 아랫목을 골라 짚을 깔고 앉혔다. 위에도 짚을 덮었다.

a 푹푹 찧다가 바스러지는 때깔 고운 하얀 소금과 태양초 고춧가루를 넣고 더 섞어 준다.

푹푹 찧다가 바스러지는 때깔 고운 하얀 소금과 태양초 고춧가루를 넣고 더 섞어 준다. ⓒ sigoli 고향

뚜껑을 닫고 행여 외풍이 들까봐 거적을 한두 개 덧씌웠다. 난방 온도도 평소보다 조금 높게 올렸다. 만 이틀이 지났을 무렵 꺼내보기로 했다. 육안으로 보기엔 거뭇거뭇해졌을 뿐 냄새와 때깔이 기대 이상은 아니었다.

다소 실망했지만 한번 열어 보았으니 이젠 찔 차례다. 너른 그릇에 옮겨 홍두깨로 대충 치대려고 국자를 들이대는 순간 거미줄마냥, 한 달여 가득 머금은 섬유질을 뱉어내는 누에 실처럼 끈적끈적한 균사체가 잘잘 흐르고 있다. 이게 고름이련가.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아내에게 밥만 앉히라고 하고는 알갱이를 빻다가 쌀뜨물을 미리 잡고 투가리(뚝배기)에 넉넉히 담았다. 국물 멸치를 넣고 말린 표고버섯 두 개를 넣었다. 마늘까지 찧었으니 이젠 고춧가루와 무를 얇게 쳐서 넣으면 된다. 집안에 "파바박" 밥 익는 소리가 들리고 청국장 끓은 냄새가 가득 퍼지자 파를 썰었다. 절반은 빻지 않고 되직하게 끓인 청국장 대령이다.

적당히 익은 김장김치 한 쪽을 잘라 상에 차렸다. 뽀글뽀글 밭아지는 청국장찌개까지 차려지니 검소한 밥상이지만 여느 대갓집이 부럽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콩을 좋아하도록 길들인 아이들도 서로 콩을 밥에 올려먹겠다고 야단이다.

a 콩이 좀 씹히도록 덜 찧고 마늘, 표고, 멸치에 무를 채썰거나 엇비슷하게 쳐서 넣고 파를 넣고 막판에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목넘김이 무척 좋아진다. 입맛에 따라 신김치를 넣어도 좋다.

콩이 좀 씹히도록 덜 찧고 마늘, 표고, 멸치에 무를 채썰거나 엇비슷하게 쳐서 넣고 파를 넣고 막판에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목넘김이 무척 좋아진다. 입맛에 따라 신김치를 넣어도 좋다. ⓒ sigoli 고향

냄새가 배지 않도록 일찌감치 방바닥에 뒹굴던 이불을 미리 장롱에 처박아 넣고, 문틈 사이로 냄새 빠지라고 삐끗 열어 놓은 문이 무색하게 지독한 냄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달달하고 구수하고 진한 맛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마침 가느다란 콩나물과 숙채를 무쳐 놓았다. 여기에 김치 서너 가닥을 넣고 청국장을 두어 숟가락 끼얹고 나물을 듬뿍 올려 둘둘 비벼서 한 입 가득 떠먹었다. 한 번 먹은 청국장은 연신 숟가락질을 재촉했다.

비벼 놓은 밥에 한 술 더 끼얹고 그 틈을 못 참고 한 숟가락은 입으로 직행을 한다. 얼마나 더 먹었을까,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재차 반 그릇을 퍼 담았다. 나물도 바닥이 드러나 보인다. 뗀잔거리던 아이들도 감쪽같이 비우고 만다. 홍어탕 진한 냄새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냄새난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문을 열어젖혀 공기 순환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운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뱃속이 조화를 부리는 모양이다. 낮에 먹은 라면이 소화가 되는 건지 체증이 가시려는 듯 꼬르륵 꼬르륵 소화를 돕는 소리에 잠 못 드는 밤이 시작되었다. 배가 고프다는 징조다. 동치미를 꺼내 한술을 뜨고서야 꿈나라로 떠날 수 있었다.

첫 작품치고 근사하게 된 청국장에 천일염과 고춧가루를 넣어 동생네에도 나눠줬다. 서너 되 남겨뒀으니 내년 봄까지 내 입은 궁금하지 않으리라.

a 콩나물과 무채, 시금치가 적격인데 콩나물과 배추 숙채를 넣고 김치를 넣고 비벼도 그만이다.

콩나물과 무채, 시금치가 적격인데 콩나물과 배추 숙채를 넣고 김치를 넣고 비벼도 그만이다. ⓒ sigoli 고향

덧붙이는 글 | 꽤 오랜 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고향 느낌이 풀풀 나는 인터넷고향신문  www.sigoli.com 창간을 앞두고 글손이 잘 잡히지 않았답니다. 이제 올해가 다 가기 전인 이달 30일에 sigoli 고향을 꼭 선보이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질책 바라며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성심성의껏 준비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꽤 오랜 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고향 느낌이 풀풀 나는 인터넷고향신문  www.sigoli.com 창간을 앞두고 글손이 잘 잡히지 않았답니다. 이제 올해가 다 가기 전인 이달 30일에 sigoli 고향을 꼭 선보이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질책 바라며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성심성의껏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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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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