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와 너무 진도 빨리 나가지 마!"

남자친구가 있는 제자들에 대한 고민

등록 2005.11.17 10:35수정 2005.11.1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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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이번 한 번만…."
"안 된다고 했잖아."
"선생님 이번…."
"안 된다니까 그러네. 그럴 수 없어!"
"이번 한 번만…."
"허허.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있고 해줄 수 없는 일이 있어. 절대 안 돼!"

그렇다. 그것은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남자친구와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도록 제 엄마한테 거짓말을 해달라니! 내가 아무리 개방적이고 포용력이 있다고 해도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절대'라는 선은 절대적으로 허물어질 공산이 크다. 나처럼 마음이 모질지 못한 사람은 더욱. 어쩌면 그래서 더욱 더 모질게 마음을 다져먹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정말 안 되는 일이었지만 되는 쪽으로 잠깐 마음이 기울기도 하는 것은 녀석이 남자친구와 단둘이서만 밤을 새우지는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럼 누구와? 바로 남자친구 가족들이었다. 그러니까 녀석은 일찌감치 남자친구 가족들과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된 모양인데, 문제는 남자친구가 사귄 지 이백여 일 만에 군대를 가게 된 것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아 대뜸 이렇게 물었다.

"군대라니? 남자친구가 몇 살인데 군대를 가?"
"저하고 두 살 차이밖에 안 나요. 제가 열여덟, 오빠가 스물."

하긴 춘향이가 이몽룡을 인생의 반려자로 받아들인 나이가 이팔청춘 열여섯이 아니었던가.

어쨌거나 참 귀찮은 일이었다. 오전 내내 쉬는 시간만 되면 화장실도 못 가게 붙잡아 놓고 달달 볶던 아이가 오후에는 친구를 셋씩이나 동원하여 다시 교무실로 찾아왔다. 한 아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선생님 보내줘요. 오빠 가족들도 함께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그렇다고 어떻게 거짓말을 해. 그런 일로 거짓말 할 수 없어."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서 한 번쯤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아요."

요즘 아이들은 참 맹랑하다. 다른 곳도 아닌 교무실에 와서 다른 일도 아닌 남자 친구와 외박을 하는 일로 선생님께 거짓말을 해달라고 당당하게 부탁을 하다니! 거기에 친구들까지 가세하여 숫제 협박이 아닌가. 하지만 내 반응도 만만치는 않다.


"난 십 년 전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말을 안 하기로 약속을 했어. 내 스스로 하고, 그리고 선생님 사모님에게도 하고. 그 약속을 깰 수 없어."

정말이었다. 십년 이 쪽 저 쪽일 거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 또 그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것은. 그 무렵의 일이다. 속옷 바람에 거실로 나와 습관적으로 아침 기도를 하다가 문득 결심을 했던 것이다. 거짓말을 하지 말자. 특히 나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자. 어떤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자.

아침 기도 시간에 문득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그만큼 내가 도덕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의 이유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별 도움이 안 되는 일로도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 앞에 갑자기 기도의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인생도 아닌데, 이 한번 뿐인 삶에서 아내에게 한 일이 내 작은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한 것뿐이라면 씻을 수 없는 후회를 남길 것만 같았다.


아내를 만난 것은 스물 한 살, 그해 가을이었다. 그 이듬해 봄이 되자 나는 군대에 갔다. 입대 후 아직 계급장도 받지 않은 훈련병 신세로 연병장에서 풀을 뽑다가 나는 아내(당시는 애인)가 참으로 보고 싶어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그 광경을 목격한 훈련 조교가 나에게 다가와서는 우는 이유를 물었다. 허튼 한마디 말에 귀때기가 날아갈 판인데도 나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 아내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목구멍에서 쉰내가 나도록 완전군장 차림으로 연병장을 돌고 난 뒤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사랑의 열병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셈이었다.

보고 싶다는 것. 사람이 사람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 세상에 그만큼 애절한 것이 또 있을까? 벌써 삼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막막했던 보고픔의 기억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않았어도, 그 한 토막의 생생한 기억만 없었어도 나는 절대로 녀석의 엄마에게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일 반 아이들끼리 산에 갔다가요, 내려와서는 다 같이 찜질방에 가기로 했거든요. 아이들과 좋은 추억도 만들고 유익한 대화도 많이 나누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불쑥 들면서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나 선생 맞아?"

여학생 담임을 하다보면 남자 친구를 사귀는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줄 것인지 고민을 할 때가 있다. 지금은 공부에만 신경 쓰고 남자 친구는 대학에 가서 사귀어도 늦지 않다고 말해줄까?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해본 기억이 없다. 그렇게 말한들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난 가슴에 부채질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어떻게 하다니? 그 자신의 일인데.

그날 청소시간에 녀석을 만났다. 그렇게 보아서 그랬는지 녀석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안쓰러운 생각도 들고 해서 한 번 안아주고 싶었지만 생각만 그렇게 하다 말았다. 대신 군밤을 좀 센 것으로 한 대 먹여 주었다. 아픈 듯 미간을 찡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아이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와 통화 했다. 허락하셨어. 그렇다고 남자 친구와 너무 진도 빨리 나가지는 말고, 알았지?"

그 후 몇 주가 지났다. 모둠별로 가기로 한 산을 비 때문에 가지 못하고, 대신 저녁을 함께 먹고 2차로 노래방에 가기로 했는데 한 아이가 불쑥 이런 제안을 했다.

"선생님, 우리 남자 친구 데려와도 돼요?"
이런 경우 내 대답은 들어보나마나.
"당연히 되지."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해놓고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야, 그럼 ○○이가 너무 슬프잖아. 군대에 있는 남자 친구를 데려올 수도 없고."

한 가지 수가 있긴 했다. 내가 대신 파트너가 되어주는 것.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늙은 선생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녀석의 말이 당차고 맵기까지 했다.

"오빠가 군대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제가 선생님하고 바람피우면 안 되지요."

녀석에게 한 방을 먹은 셈인데 기분이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모처럼 기분 좋은 저녁 시간을 보내고 2차로 간 노래방에서 조금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려한 조명이 난무하는 좁은 공간에 세 명의 여학생과 그들이 초대한 두 명의 남학생들을 남겨둔 채.

내가 나가려하자 평소에는 친구처럼 나를 헐겁게 대하던 아이들이 새삼스럽게 선생 취급을 하는지 음악을 끄고 깍듯이 인사를 했다. 뭐랄까? 전적인 신뢰와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예쁘고 성숙한 눈빛을 하고서.

덧붙이는 글 | 월간지 <사과나무>에 기고한 글을 조금 고치고 보탰습니다.

덧붙이는 글 월간지 <사과나무>에 기고한 글을 조금 고치고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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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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