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09회

등록 2005.11.18 08:52수정 2005.11.18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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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어 사제에게까지 쫓겨야 하는 신세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백결은 탄식했다. 이미 술이 거나해졌는지 그의 얼굴은 불콰해 보였다.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한 번 만나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인물은 사십대 중반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중년인이었다. 그의 뺨에는 한줄기 상처가 깊게 나있었는데 검이나 도와 같은 예리한 병기에 의한 것이 아닌 갈쿠리나 손톱 등에 의해 찢긴 상처로 보여 흉측했다.

“하륜(荷崙), 자네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겐가?”

하륜은 백결의 좌우산인 중 우산인이다. 경공과 도법에 능한 그는 자신의 얼굴 상처 때문인지 남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동고동락했던 형제들 아니었습니까?”


백결은 처량한 자신의 신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사형제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외로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없던 좌우산인을 불러 대작을 하는 중이었다. 하륜의 말에 백결은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그러자 하륜의 옆에 앉아있던 인물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이는 그 인물은 이마에 푸른 힘줄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마른 체형이었다. 좌산인인 그는 감정의 기복이 없는 듯 입술만 움직일 뿐 다른 곳은 변화가 없었다.

“잔흠(潺歆)... 자네는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가? 이렇게 흐지부지 주공께서 정녕 사형제 분들과 등을 돌려야 한단 말인가?”

잔흠의 말에 하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비난하듯 말했다. 하지만 잔흠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본래 구구절절 자신의 말을 다시 부언 설명하거나 토를 다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그것을 상대가 어찌 받아들이던 상관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상치되자 백결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두 사람 중 누가 틀린 것이 아니다.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이었지만 나름대로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백결은 고민하는 듯 했다. 하지만 선뜻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던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훌쩍 마셨다.

“과음하시는 것 아닙니까?”

하륜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술을 잘하지 못하는 백결이 오늘따라 폭음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 잔 따라 주겠나?”

백결은 빈 잔을 하륜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하륜은 걱정이 된다는 듯 백결을 바라보다가 술병을 들어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 때 백결이 술이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연락은 했겠지?”

무슨 뜻일까? 하륜은 자신을 보며 말하는 백결의 말뜻을 몰라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연락을 말하시는 것인지...?”

그 때였다. 찰랑찰랑 넘칠 듯한 술잔이 백결의 손에서 힘없이 빠져나갔다. 그 술잔은 탁자로 떨어져 내렸는데, 그것을 본 하륜이 탁자에 떨어져 깨지기도 전에 손을 뻗어 이미 그 술잔을 잡아챘다. 약간 술이 흘렀지만 술잔이 탁자 위로 내동댕이쳐지거나 깨지는 흉한 꼴은 면한 셈이었다.

“..........!”

하지만 그 술잔은 어차피 탁자 위에 나뒹굴 팔자였다. 어느새 손을 뻗었는지 백결이 하륜의 완맥을 잡자, 그 술잔은 맥없이 하륜의 손을 벗어나 탁자 위로 떨어져 술을 토해내고는 나뒹굴고 있었다.

푸---욱---!

잔흠의 왼손에 들린 비수가 하륜의 늑골을 파고들었다. 살기를 느낀 하륜이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백결에게 완맥을 제압당한 상태라 피할 수 없었다.

“전월헌에게 우리가 이곳에 있다고 말이야....”

하륜의 늑골에 비수가 박힌 것과 백결이 대답을 시작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전 잔흠은 비수를 빼냈다가 또 다시 하륜의 옆구리를 찔렀다.

“허--억--!”

헛바람이 빠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 것 역시 시차가 거의 없었다. 술잔이 탁자위로 떨어지고, 백결이 던진 말, 그리고 잔흠이 두 번을 연속해서 하륜의 옆구리를 찌른 것은 거의 눈 함 번 깜빡일 정도의 짧은 순간에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륜의 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파고 든 비수는 그 어떤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이질적이고 화끈한 느낌을 주었다.

“알...알고...계셨소?”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에서 선혈이 주륵 흘렀다. 백결은 아직 하륜의 완맥을 놓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떡였다.

“전월헌 하나라면 굳이 자네를 죽일 필요가 없었을 게야. 하지만 방사제는 무서울 정도로 심계가 깊은 인물이지.”

“조심했는....데.....”

“자네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못하겠군. 우리가 천마곡으로 간다고 말이야.....”

우두둑----

백결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하륜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잔흠은 아주 냉정하게, 한 점의 표정도 변하지 않고 비수를 꺾고 있었다. 그제서야 백결은 하륜의 완맥을 풀었고, 하륜의 몸은 탁자 위로 힘없이 무너졌다.

“하륜에게서 소식이 없고, 우리를 찾지 못하게 되면 전월헌은 나 대신 담천의를 노리게 될게야. 그보다 먼저 우리가 담천의를 찾아야 돼.”

잔흠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다짐을 하는 말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잔흠은 하륜이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비수를 뽑아 하륜의 옷에 피를 닦아 냈다. 형제와 같은 사이였지만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내가 모습을 감추게 되면 아마 방백린이 무척 당황하게 되겠지. 결국 마지막 남은 패를 사용하게 될게야. 여덟째 사제..... 그 까지 동원해 담천의를 죽이려 들겠지.”

그들의 여덟째 사제.... 그는 지금까지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백결이 네 명이라 했던가? 방백린과 유항, 전월헌, 그리고 남은 여덟째 사제를 합쳐서......?

백결의 시선은 죽어 있는 하륜의 머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믿었던, 그리고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좌우산인 중 한 명이 자신을 배반한 것이다. 아니 배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의 감시자였는지도 모른다.

그 동안 백결은 매우 의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방백린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행적을 손금 보듯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수하들 중 방백린과 연결된 끈이 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자를 색출해 내려고 했고, 급기야는 가끔 그는 중요한 일에 좌우산인을 일부러 대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행적을 알려주는 자가 바로 좌우산인임을 확인했다. 그는 그 동안 매우 조심스레 살펴보았고, 그 자가 하륜이었다.

하지만 앓던 이를 빼낸 백결의 얼굴 표정은 매우 침중했다. 자신에게 했듯이 다른 사형제들에게도 분명 심어놓았을 것이었다. 사형제들이 위험했다. 그는 바삐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74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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