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천마곡 내에 자연스럽게 경계를 그을 수 있는 내(川)가 가로지르고 있어 피아를 구분하고 나름대로 정비를 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진영을 구축할 수 있는 곳은 얼마 전까지 채소나 곡물을 심었던 흔적이 있어 밭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지금은 잡초만 자라고 있을 뿐 올해 들어 경작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에 비해 내(川) 건너편 쪽은 밭이 고르게 깔려있고, 심은 지 꽤 되었는지 제법 푸른 싹이 고르게 자라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놈들이 아예 이 안에서 끝장을 보자는 건가?”
분통을 터트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린 인물은 동정채(洞庭寨)의 채주인 철부왕(鐵斧王) 나정강(羅晸康)이었다. 그는 의복 전체가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다행히 심한 부상을 입은 곳은 없어 보였다.
이번 기습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 바로 칠결방(七結邦)의 방주인 귀영무도(鬼影霧刀) 진대관(陳大棺)과 나정강이 이끌었던 선발대의 삼진이었기 때문에 악전고투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진대관 역시 옷에는 아직 굳지 않은 피가 이곳저곳에 묻어있었다.
“본 가주 역시 진입로가 되는 천마곡 입구를 저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막아 버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소.”
황보가의 가주인 황보장성(皇甫長成) 역시 어두운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진입과 퇴로가 되는 유일한 통로를 막아버리는 것은 이곳 안에서 사생결단을 내자는 뜻과 다름없었다.
“어찌하면 좋겠소?”
구파일방의 이진을 이끌고 진입했던 무당의 장문인인 청허자(淸虛子)가 구효기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좌중의 시선이 구효기에게 모두 쏠렸다. 어차피 배분이나 위명으로 따지자면 구효기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으음.....”
그는 좌중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탄식인지 헛기침인지 모를 신음을 흘리고는 좌중을 바라보았다. 좌중의 얼굴에는 미세하지만 기대하는 기색도 있었고, 탓을 하는 듯한 기색도 섞여 있었다.
“노부로서도 상대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소. 아니 상대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 예측하지 못한 노부의 잘못이 크오.”
일단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길이 좌중의 신임을 잃어버리지 않는 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피우다가는 배척당하기 쉽다. 그 이후의 결과는 머리 없는 오합지졸이 될 것은 뻔한 일.
“상대가 입구를 막은 것은 이곳으로 진입한 선발대의 전력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소. 지리적인 이점과 이미 외부로부터 들어 온 적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에 대한 대비가 충분했으리라 생각되오.”
현 상황에 따른 정확한 분석이었다. 좌중 역시 그의 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 생각 못하는 인물은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대비책이 문제였다. 상대의 함정에 빠졌다면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다.
“대비책이 있겠소?”
말을 되도록 아끼는 모용가의 가주인 모용화궁이 물었다. 하지만 좌중은 사실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표정들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 역시 지모라면 남들에게 뒤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 인물들이다.
상대는 이미 자신들의 전력을 알고 있다. 그것을 알기에 후속전력을 보태주는 후발대와 연결로를 끊었을 것이다. 충분한 자신이 없다면 연결로를 끊을 수 없다. 어차피 이곳은 막다른 곳이라 자신들 역시 빠져나갈 수 없다고 볼 때 이곳에서 둘 중 하나가 사라질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결론이다.
구효기는 망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동요하는 좌중의 분위기에 휩쓸리다가는 모두를 잃게 된다. 그는 품속에서 붉은 색 소기(小旗)를 꺼내들고는 자신의 앞에 꽂았다. 금색과 청홍의 수실이 달려있는 그 소기에는 맹(盟)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바로 군웅들이 만들어 준 제마척사맹의 맹주 신위를 나타내는 영부(領符)이자 신물(信物)이었다. 맹주가 온다면 전해주려 했던 것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구효기가 맹주의 신물을 꺼내 앞에 꽂아 놓은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우리는 마교와 구마겁의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이곳에 온 것이오. 우리 스스로 희생해 무림을 구하고자 모인 것이고 이곳까지 온 것이오.”
스스로 원했던, 아니면 눈치를 보다가 합류했던 간에 명분은 이것이었다. 따라서 누구라도 이곳에서 뼈를 묻는다 해서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타 방파에 책임을 미룰 수 없었다. 구효기는 이 점을 명백히 해 둔 것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실망을 하거나 불안해 할 것도 없소.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직 충분한 양식과 정예전력이 있소.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는 모르지만 현 전력이라면 어떠한 적과 마주쳐도 뒤질 것이 없소.”
구효기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들 역시 동의했다. 더구나 중원제일의 지모를 가졌다고 알려진 구효기의 능력을 애써 폄하(貶下)한다 해서 그들에게 이로울 것도 없는 일.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나서지는 못해도 누군가가 나서는 것을 끌어내리는 짓 따위는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아직 상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소. 올 초 스물네 명의 희생으로 알아낸 일부분의 정보가 사실 전부라 할 수 있소.”
칠결방(七結邦)의 방주인 귀영무도(鬼影霧刀) 진대관(陳大棺)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매우 신중해 소심하다고까지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구효기는 한편으로 진대관을 경시하지 않았다. 군웅들 앞에 잘 나서지는 않지만 주어진 상황을 가장 잘 판단할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좋은 지적이오. 노부 역시 이곳에 들어와 적들이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소. 그들에게는 아주 지모가 뛰어나고 병법에 탁월한 인물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소.”
“전각들의 배치가 범상치는 않더이다.”
구효기는 자신의 말을 금방 알아듣는 진대관이 생각보다 꽤 괜찮은 인물이라 생각했다. 제일 나중에 들어와 곤욕을 치르는 가운데서도 상대방을 파악하려 한 그의 판단력은 인정해 줄만 했다.
“심은 나무 하나, 놓인 돌까지도 모두 방위를 계산해 만든 것이오. 주위 경물과 어울려 오묘한 진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낭패를 당하게 되어 있소. 더구나 그들이 우리에게 이곳을 아무런 대가없이 내 주었다고 생각하시오?”
구효기의 부언 설명에 좌중은 진대관이 말한 의미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더구나 구효기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곳은 전각들이 세워져 있는 곳보다 낮은 지형이다. 만약 내(川)의 물을 막아 일시에 터트리거나 화공으로 공격한다면 매우 불리한 지형이었다.
그것을 벗어나려 상대가 있는 곳을 공격하려다가는 자연 지형과 인공으로 만든 진식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은 당연한 일. 좌중은 적들이 자신들을 상대하려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해 왔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왜 이곳에서 승부를 보려는지 알았다. 유리한 모든 조건을 이용해 결전에 임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다.
“그렇다면 공격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이리 앉아서 당해야 한단 말이오?”
나정강이 다시 분통을 터트리며 물었다.
“그럴 리야 있겠소? 방법은 분명 있을 것이오. 구거사의 신산귀계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니 믿고 기다려 보시오.”
나정강의 옆에 앉아있던 진대관이 달래듯 말했다. 진대관은 구효기를 전적으로 믿는 것 같이 말했지만 그 말에는 교묘하게 모든 책임을 구효기에게 지우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구효기는 내색하지 않았다. 진대관은 자신이 끌어안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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